“인간이란 존재는 자기가 잘못됐다고 알아챈 순간, 그걸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못되지 않은 게 될까, 어떻게 하면 자기가 옳은 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104쪽)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상황을 맞닥뜨린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떠한 미래로 이어질지 모르는 상태로 그때그때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데뷔 20주년을 맞은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가 쓴 ‘다리를 건너다’가 국내 번역·출간 됐다. 담담하지만 노련한 시선으로 인간 심리의 부조리를 조명해온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오늘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섬세하게 그려냈다.불확실한 삶의 양상을 강하게 일깨워주는 작품으로, 세 주인공은 일상을 위협하는 각각의 사건을 계기로 자기 가치관의 ‘정당성’에 집착하게 된다. 미술관 큐레이터 아내, 고등학생 처조카와 함께 살고 있는 맥주 회사 영업 과장 아키라는 평탄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이따금 안쓰러운 홀어머니와 지나버린 젊은 날이 마음을 괴롭힌다. 도의회 의원 남편을 둔 아쓰코는 집안 살림을 정갈하게 꾸리며 아들을 키우는 삶을 만족스러워하지만 작은 일 하나에도 조바심을 친다. 다큐멘터리 감독 겐이치로는 가난 속에서 꿈을 키우는 아이들과 홍콩 우산혁명을 취재하며 자긍심에 부풀지만 결혼을 앞두고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연인이 있다. 이렇듯 완벽하지 않아도 감당 가능했던 이들의 삶은 이내 미묘하게 불안해진다. 아키라의 집 앞에 수상쩍은 물건이 잇달아 놓이고, 아쓰코는 도의회 성희롱 발언 사건이 남편 소행인 것만 같고, 겐이치로는 연인과 마음껏 만날 수가 없는 이유가 다만 일 때문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과연 이들은 이 불안 속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또 셋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될까. “인간이란 존재는 불가사의해서 전혀 흥미도 없었고 나중에 후회한 적조차 없는데도 문득문득 그때 일을 떠올릴 때가 있다. 아키라는 공상 속에서 이 가게를 이어받는다. 아유미가 아닌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지역 상점가의 임원 같은 것을 맡고 있다. 속 썩이는 아들이 있을 때도 있다. 입은 험하지만, 주변에서 미인이라고 평판이 자자한 딸이 있을 때도 있다. 이런 바보 같은 공상을, 예를 들면, 출퇴근 시간 중에 전철 같은 데서 한다. 딱히 현실 생활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좋은 일도 없는, 정말로 평상시와 똑같은 날에 왜 그런지 또 하나의 자기를 공상한다.”(91쪽) 작품 대부분이 복선으로 구성됐다고 볼 수도 있는 이 소설 속에서 작가는 “눈 앞의 이해관계나 자기합리화에 집착하기보다는 보다 넓은 안목으로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호소한다. 옮긴이 이영미씨는 “’다리를 건너다’는 무수한 보통 사람들의 작은 결단들이 엮어서 만들어지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라며 “’그 때 바꿨으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는 작중 인물의 말은 지금 당장 실행하지 않고 후회만 남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는 저자의 메시지인 셈”이라고 말했다. 548쪽, 은행나무,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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