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는 바와 같이,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로 직역되는 말이다. ‘훈민정음’을 의역하면 ‘조선의 백성들과 후예들에게 가르치는 바른 표음문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훈민정음’이란 명칭에는 지역적·민족적 제한성이 내포돼 있다. 그러한 제한성을 극복하고 오늘날 훈민정음이 세계적인 표음문자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문제점들이 해결돼야 한다. 그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세종대왕께서 중국의 치두음과 정치음을 표기할 수 있는 자형을 따로 만든 것처럼, 우리말에 없는 외국어의 음들에 대해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양식(pattern)에 맞게 새로 만들어 표기하는 일이다. 그런데 국립국어원 발간 2018년 1월 9일자 ‘한국 어문 규정집’ 내 ‘외래어 표기법’을 보면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 자모만으로 적는다”고 제한하고 있다. 훈민정음 28자로도 부족할 판인데, 한글 24자로만 한정하고 있으니 훈민정음의 세계화는 난망하다. 뿐만 아니라 규정집 136쪽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를 보면, 로마자 b와 v를 똑같이 ‘ㅂ’으로 적도록 해놓았다. p와 f 또한 똑같이 ‘ㅍ’으로 적게 해, 현행 규정으로써는 원천적으로 이 소리들을 구별해 적을 수 없게 돼있다. 상황이 이와 같고 또 세종께서 안계시기 때문에 새 글자와 관련해선 정부와 국민들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물론, 로마자를 잘 쓰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표음문자를 만든다고 해도 가져다쓸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다. 하지만 우리말에 없는 외국 음들을 우리 글로 표현 못한다면 ‘전대미문의 문자학적 사치’라는 훈민정음의 찬양은 무색해진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무한한 확장성은 진실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참고를 위해 고문자 및 훈민정음 연구가로서 그간 고심 끝에 획득한 연구 결과를 제시코자 한다.먼저 v와 f를 순경음(脣輕音) ‘ㅸ’와 ‘ㆄ’로 표기하자는 일각의 의견을 살펴보자. 비록 지금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만 쓰이고 있지만, 우리말 순경음은 세종대왕 때와 똑같이 살아있다. 예를 들어, 경상도에서는 아직도 ‘더워’와 ‘추워’를 ‘더붜’와 ‘추붜’라고 발음한다. 유심히 관찰해보면 ‘덥다’와 ‘춥다’의 종성 ㅂ은 위아래 입술을 서로 붙이는 정도가 중(重)하다=크다. 그래서 ‘순중음(脣重音)’이다. 그러나 ‘덥워’를 발음할 때, 종성 ㅂ은 ‘워’의 초성 ‘ㅇ’과 합류해 상하 입술을 붙이는 정도가 가벼워(輕)=적어=약해지는 순경음(脣輕音) ‘ㅸ’으로 변해버린다. 현대한국어에서 순경음은 더 약해져 ‘ㅸ’에서 ‘ㅂ’이 소멸되고 아래의 ‘ㅇ’만 남게 되니, 이러한 변음과정을 한 눈에 표현하면 ‘덥워→더ㅸㅝ→더워’이다. 차이가 있다면, 세종 때는 ‘석보상절’에서 증명되듯 순경음을 발음도 하고 글자 표기도 했지만, 지금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발음은 하되 ‘ㅂ’과 ‘ㅸ’을 구분해 표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의 교육과 정책 때문이다. 사실이 이와 같으므로, 두 입술을 사용하는 순경음 ‘ㅸ’과 ‘ㆄ’을 윗니와 아랫입술로 내는 v와 f의 표기로 쓰는 것은 맞지 않다. 고로 v와 f를 훈민정음 식으로 표현키 위해서는 새로운 정음 자형을 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본다.‘方(방)’을 중국 보통화에선 명나라 때와 달리 fāng이라 발음하며, f를 ‘순치음(脣齒音)’이라 한다. ‘순치음’의 ‘脣(순)’은 아랫입술이며 ‘齒(치)’는 ‘윗니’다. 고로 훈민정음을 적용한 순치음 자형은 순음과 치음이 함께 표현돼야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로마자 v는 치음 기본자 ㅅ과 닮았다. 단지 상하 방향만 다르다. 牙(어금니 아)의 고전 자형이 창조될 때 90도 회전시키는 융통성이 발휘됐듯, <사진>에서처럼 치음 ‘ㅅ’에 회전을 가해 입술음 ㅍ과 ㅂ에 융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마치 윗니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누르면서 발음되는 F 소리의 모습이 상형적으로 구현된다. F 상형자에서 윗선을 감획한 ②안 자형을 V 음의 상형자로 할 수도 있지만, 그리 되면 ‘ㅂ’과의 자형적 연계성이 ①보다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