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의 자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방고전(字倣古篆)이란 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자방고전 내 고전(古篆)이란 진나라 때의 소전과 그 이전의 대전(大篆)을 총칭한다. 또 ‘대전’은 좁게는 서주 선왕(宣王) 때에 태사였던 주가 창작한 글자체를, 넓게는 소전 이전의 모든 옛날 글자체로써 은상(殷商)과 주나라의 금문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고전’의 ‘古(옛 고)’자로 볼 때, 먼저 관련 고대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BC1018년 2월 22일 무왕(武王)은 은나라와의 목야대전에서 승리하고 천자국 주나라를 건국했다. 그런데 천자국은 바뀌었으나 주나라의 문자 체계는 은나라의 은문(殷文)을 그대로 이어 썼다. 이 전쟁 직후, 은나라의 왕족이자 현인인 기자(箕子)는 5000여명을 이끌고 동쪽 고토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 BC1016년에 무왕이 예를 갖춰 기자에게 직접 찾아가 천도(天道)를 가르쳐주길 요청했다. 이에 기자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주었고, 그에 대한 답례로 스승의 자격으로써 독립국 조선을 인정받고 천년왕국 기자조선의 기틀을 확립한다.  기자조선의 후예인 부여는 은력을 썼으며, 부여의 후예인 고구려 또한 선조인 기자에게 제를 올렸다. 이성계의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듯 기자의 ‘조선’을 이은 명칭이다. 이러니 세종의 시각에서는 기자조선의 조상국인 은나라가 각별했을 것이고, 은상의 문자인 고대 금문(金文)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착을 느꼈을 것이다. 송나라 때 황실에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금문을 위주로 한 금석학(金石學) 열풍이 불었다. 1063년 북송 인종(仁宗) 시기 선진고기기(先秦古器記)를 필두로, 고고도(考古圖), 고기도(古器圖), 금석록(金石錄), 선화박고도록(宣和博古圖錄), 집고록(集古錄) 및 <사진 2>에 보이는 왕구의 ‘소당집고록(嘯堂集古錄)’ 등 많은 고문자 관련 서적들이 발간됐다. 자방고전이란 기록으로 볼 때 세종은 당연히 소전(小篆)과 위의 서적들을 집중 연구했을 것이다. 훈민정음 28자 중, 중성의 기본 세 글자는 각각 천지인(天地人)을 표현하되 <사진 1>에서처럼 실물이 아닌 금문에서 그 자형을 본떴다. 금문 ‘天(천)’자에 보이는 둥근 점(•)은 단독으로 쓰일 때는 ‘丁(정)’의 고자이다. 丁은 갑을병정할 때도 쓰이고 ‘위’의 뜻도 나타내니 ‘上(위 상)’과 의미상 동자이다. 따라서 금문 ‘天(천)’은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인 ‘천제(天帝)’, 또는 사람의 위쪽에 있는 상천(上天) 즉 ‘하늘’을 뜻한다. 天의 위쪽 둥근 점은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과 부합돼 세종께서는 이를 핵심자형으로 취했고 훈민정음 해례본에선 ‘•... 形之圓, 象乎天”이라 했다.금문과 소전의 ‘立(립)’자에 보이는 맨 아래 횡선은 ‘한 일’자가 아니라 ‘땅(地)’을 나타낸다. 고대의 ‘땅은 네모지다’라는 2차원적 인식과 달리 1차원적으로 직선 표현한 것인데, 세종은 사람이 땅 위에 서있는 모습의 立자에서 평평한 땅을 그린 가로선을 취해 썼으며 해례본에선 ‘ㅡ... 形之平, 象乎地也’라 설명했다.그리고 천지인 중 사람을 표현할 때 ‘大’자에서 팔다리를 뺀 수직선을 취했는데, 人만이 아니라 大자 또한 직립한 사람을 그린 것이고, 또 天과 땅이 그려진 立자에도 大자가 공통으로 들어있는 것을 두루 감안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례본에선 ‘i’ 모음의 자형에 대해 간단히 ‘ㅣ... 形之立, 象乎人也’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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