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졌던 박열 선생이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의열단`의 단원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재판기록이 발견됐다.박열 선생은 1923년 도쿄에서 일왕(日王)과 왕세자의 처단을 기도했다가 일제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은 인물로, 2017년 이준익 감독이 영화 ‘박열’을 제작해 재조명 받기도 했다.의열단 독립운동사의 권위자로 꼽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16일 박열 선생이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일본 도쿄 지방재판소 기록을 공개했다.김 전 관장은 이번에 출간되는 저서 ‘의열단, 항일의 불꽃’(2019년, 도서출판 두레)에서도 이같은 내용을 공개할 계획이다.김 전 관장이 이번에 공개한 자료는 1924년 4월2일 도쿄 지방재판소 제8회 신문조서 내용으로, 박열 선생이 당시 “피고(박열)는 의열단에 가입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의열단과 관계는 있다”고 답한 부분이 기록돼 있다. 이어 “의열단의 주의(主義)는 뭔가”라는 물음이 나오자 박열 선생은 “의열단은 일본 자본주의적 제국에 대해 폭력으로써 대항하는 단체다”라고 의열단의 성격을 명확히 설명했다.박열 선생은 “허무사상의 피고가 어째서 의열단과 제휴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공통의 문제 때문”이라면서 “의열단이 일본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점에서 내 사상 감정에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김 전 관장은 재판기록에 대해 “일본에서 재판을 받으면 누구든지 가급적 자기를 숨기려고 하고 축소하려고 했다”며 “그것은 박열 선생도 마찬가지였다”고 당시 시대 상황을 먼저 상기시켰다.이어 “당시 의열단이라고 하면 일제가 최고의 악종(惡種)으로 봤다”면서 “가급적이면 (일제에게) 누구한테 지시를 받았다거나, 무슨 계열이라거나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그러면서 “박열 선생은 ‘의열단원이냐’고 물으니까 오히려 의열단과 ‘관계’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시인을 했다”며, 당시 일왕 부자의 처단을 계획한 국사범(國事犯)으로 몰리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이를 인정한 것은 박열 선생이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박열 선생은 1922년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왕과 왕세자를 폭살하기 위해 의열단원 김한 등을 통해 중국 상하이에 있는 의열단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김 관장은 “비록 일본으로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박열 선생이 일왕 부자를 처단하기 위해 의열단 계열을 통해서 폭탄을 가져오려고 했다”고 했다.당시는 박재혁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1920), 최수봉 밀양 경찰서 투탄 의거(1920), 김익상 총독부 투탄 의거(1921), 김익상·오성륜·이종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게이치 저격 사건(1922) 등 의열단 의거가 잇따르던 시기이기도 했다.박열 선생의 일왕 부자 처단 계획도 이 같은 의열단활동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박열 선생이 일제 경찰에 의해 검거된 이듬해인 1924년, 의열단원이었던 김지섭 선생은 일왕이 있는 도쿄 궁성 정문 앞 이중교(二重橋)에서 왕궁 진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폭탄 세 발을 투척하기도 했다.다만 김 전 관장은 저서 ‘의열단, 항일의 불꽃’에서도 “박열이 언제 어떤 경로로 의열단에 입단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당시 의열단은 비밀결사로서 단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고 다른 단원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않는 원칙까지 세웠던 만큼, 입단 경로 등에 대한 자료를 찾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일본 아나키스트 연구자 김창덕 국민문화연구소 총무이사는 “박열 선생이 ‘의열단과 관계가 있다’라고 발언한 재판기록이 문서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며, 재판기록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김 총무이사는 이번에 알려진 박열 재판기록을 국내로 가져와 번역 작업을 했다.김 총무이사는 “박열 선생이 의열단과 ‘관계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의열단의 맹원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상당한 관계가 있다고는 볼 수 있다”면서 “의열단이 당시 일본에서 활동이 필요하기도 했다”고 전했다.그는 특히 “1924년에도 일본 아나키스트들이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계기로 두 번이나 조선에서 폭탄을 일본으로 입수하려고 했다”며 “당시 폭탄 입수는 실패했지만 그만큼 일본 내에서 활동한 아니키스트들이 의열활동과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이번 발견을 계기로 일각에서는 올해 창단 100주년을 맞는 의열단에 대한 연구가 너무 소홀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함께 나온다.의열단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입지가 그 어느 독립운동 단체보다 확고하지만 국내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평가받는 박열 선생의 의열활동도 최근에야 재조명된 것이 현실이다.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 고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후에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을 긋는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이나 인물, 규모 등 대해서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의열단의 규모에 대해서도 많게는 1000명에서 부터 100명 안팎까지 다양한 주장이 나온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경무국 첩보를 보면, 의열단원 숫자를 200명 안팎으로 파악하고 있다.영국에 보고된 1923년 SIS 극동지부 보고서는 의열단원을 약 2000명으로 추산하고, 도쿄에도 5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미국 여류작가 님 웨일즈는 의열단원이었던 김산을 인터뷰해 쓴 소설 ‘아리랑’에서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700명에 달한다고 서술하기도 했다.의열단이 애초에 비밀결사라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요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면서도 그만큼 연구가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올해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추진위)가 지난 9일 발족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추진위는 국내 및 국제 학술대회를 열고 알려지지 않은 의열단원의 발굴에 역점을 둘 계획이다. 또 의열단 활동을 연구하는 별도의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김 전 관장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은 세계사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우리도 의열단을 그렇게 연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오는 23일 박열 선생의 배우자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여사의 93번째 추도식이 경북 문경 박열의사기념관 내 가네코 후미코 여사 묘소에서 거행된다.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아니키즘 항일운동 단체 ‘불령사’에서 박열 선생과 함께 활동을 했다. 그는 1923년 박열 선생과 함께 조선인·일본인 일왕 암살을 기도한 죄로 재판에 회부됐고,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지만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정부는 지난해 가네코 후미코 여사에게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첫 번째로 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인은 박열 선생의 변론을 맡았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로, 정부는 지난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올해는 일본에서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박열의사기념관 측에 기증될 예정이라 그 의미가 더 깊을 것으로 보인다.박열의사기념관은 2003년부터 여사의 외가가 있던 일본 야마나시(山梨)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와 교류하면서, 홀수년 7월23일에 한국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 짝수년에는 일본 야마나시에서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 주관으로 추도식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