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헌정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52)가 재선에 성공하며 집권 5년째를 넘기고 있다. 케냐 유학생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혼혈로 백인 외조부모가 양육했다. 피부색 만으로는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분류된다.  ‘피부색의 혁명’으로 할리우드에서는 흑인남성을 주인공 삼아 그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영화제작이 눈에 띄게 늘었다.  쿠엔틴 타란티노(50)는 1966년작 ‘장고’의 총잡이 타이틀롤인 백인(프랑코 네로) 대신 흑인 배우(제이미 폭스)를 내세워 ‘장고: 분노의 추격자’를 만들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차별을 딛고 자신의 등번호 42번을 영구 결번으로 남긴 흑인 야구선수 재키 로빈슨(1919~1972)의 활약상을 담은 ‘42’도 지난 4월 선보였다. 최근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뉴욕에 살던 자유인인 흑인 솔로몬 노섭(1808~1857)이 노예로 잡혀간 실화를 기록한 자서전을 바탕으로 ‘노예 12년’이 개봉했다. ‘셰임’을 연출한 영국 출신 흑인 감독 스티브 매퀸(44)이 메가폰을 잡았다.  28일 개봉한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역시 흑인 감독에 의해 흑인 남자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국에서는 지난 8월 개봉해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차지한 작품이다. 할 베리(47)에게 흑인 여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몬스터 볼’(2001)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든 리 대니얼스(54)가 흑인 최고의 연기파로 손꼽히는 포리스트 휘터커(52)를 기용해 실존했던 백악관 흑인집사의 이야기에 근거한 드라마를 연출했다. 실제 모델은 유진 앨런(1914~2010), 1952년부터 1986년까지 34년간 8명의 대통령을 수발든 버틀러다.  그의 이야기는 2008년11월 워싱턴포스트 신문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흑인 후보인 오바마에게 투표하겠다는 94세의 유진 앨런을 흑인 기자 윌 헤이굿(59)이 인터뷰한 것이다. 영화는 이 기사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획됐지만, 그가 백악관의 버틀러로 일하면서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거의 픽션이다. 주인공의 이름도 세실 게인즈로 바뀌었다. 흑인 버틀러 이야기로 포장했지만, 실상 하고 싶었던 얘기는 노예로 끌려와 탄압받고 차별받아온 흑인 인권문제다. 많은 설정이 창조됐고,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교훈적으로 흐르는 것이 단점이다.  백악관 로비 천장에 서로 껴안고 교수형 당한 한 쌍의 흑인 남녀 시체를 매달아놓은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부터 충격적이다. 백인은 내키는대로 흑인을 죽일 수 있었던 시대의 상징이다. 극중 세실 게인즈는 미국 남부 조지아주 목화농장에서 태어난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밝은 피부색을 지닌 미모의 어머니(머라이어 캐리)는 흑인 농장주(알렉스 페티퍼)로부터 강간당하고, 이에 항의하려던 아버지는 즉결총살 당한다. 그를 불쌍히 여긴 여주인(바네사 레드그레이브)에 의해 ‘검둥이 하인’으로 일하게 되면서 집안일과 서빙을 익히며 집사로서의 생을 살게 된다. 큰아들은 흑인인권운동에 투신하고, 작은아들은 베트남전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이 모든 것은 픽션이다.  극중 큰아들 루이스는 남부 대학으로 진학해 ‘프리덤 라이더’라는 공공장소에서의 흑백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측근이 된다. 흑인 급진좌파 단체인 ‘블랙팬더 당’을 창당해 당시 테러리스트로 여겨지며 끊임없이 감옥을 들락거리던 그가 아버지를 만나러 백악관 부엌까지 별다른 제재 없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장면은 이러한 끼워맞추기식 설정의 한계를 보여준다.  갑자기 킹 목사의 목소리를 빌어 “흑인 버틀러들은 근면성실함으로 신임을 얻어 흑인에 대한 백인의 거부감을 없애고, 훌륭한 노동윤리와 인격을 통해 나름대로 체제에 도전해왔다”며 교조적이 되거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운 모든 분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비약적 메시지를 남기며 끝나는 것도 뜬금없다. 흑인 차별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뒤늦게 대상 영역을 넓힌 꼴이다.  사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잘 와 닿지 않지만 200만 교포들이 사는 미국에서 아시아인은 흑인보다 더한 소수약자이며, 당연히 ‘유색인종’ 범주에 들어간다. 미국 전체 인구중 백인은 80%, 흑인 13%, 아시아인 4% 정도다. 이런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남다르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관심도와 흥행성적은 아무래도 떨어지겠지만, 강제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납치해와 짐승처럼 부린 미국 역사에 부채감을 갖고 있는 미국민들로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특히 여전한 인종차별적 시선과 대우에 시달리고 있는 흑인들로서는 기꺼워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전형적인 일대기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흑인 조력자의 시선으로 본 각 대통령의 인종정책과 시각을 그린 것은 상당히 가치 있는 작업이다. 미국현대사를 장식한 대통령과 영부인으로 분한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이들의 백악관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적 재미가 쏠쏠하다.  로빈 윌리엄스(61)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제임스 마스던(40)이 존 F 케네디, 리브 슈라이버(47)가 린든 B 존슨, 존 쿠색(47)이 리처드 닉슨, 앨런 릭맨(67)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 각각 분해 리얼한 연기를 보여준다. 재클린 케네디 역은 그녀와 같이 프랑스 혈통을 지닌 민카 켈리(33), 낸시 레이건 역은 유명 여배우 제인 폰다(76)가 각각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미국 인종사에 대한 입문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역사적 오류로 가득 차있다”는 일부 보수파의 비판도 나오고 있다. 흑인인권운동에 대해서는 연대기적으로 잘 정리했으나 각 대통령의 인종문제에 대한 입장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영화는 세실 게인즈가 첫 흑인대통령이 나온 것에 감격하며 오바마를 만나러 가는 백악관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나는데, 이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카메오 출연을 고려중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섭외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오바마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해 “백악관에서 일하는 버틀러들뿐만 아니라 세대를 초월해 각 분야의 프로들이었던 모든 이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쳤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포리스트 휘터커와 극중 세실의 아내 글로리아 역을 맡은 오프라 윈프리(59)의 연기를 칭찬했다.  흑인 인권을 다룬 영화에 대한 흑인 스타들의 참여도는 대단하다. ‘토크쇼의 여왕’으로 세계 유일의 흑인 억만장자이며 미국에서 수위의 영향력을 지닌 오프라 윈프리는 연기자 출신은 아니지만 흑인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에는 발벗고 참여해왔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컬러 퍼플’(1985)에 출연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입증 받았으며, 노벨상을 수상한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82)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비러브드’(1998)에도 나왔다. 리 대니얼스 감독의 전작 ‘프레셔스’(2009)의 제작을 맡기도 했다. 윈프리 외에도 세계적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43)를 비롯해 네 번이나 그래미상을 수상한 록스타 레니 크라비츠(49), 쿠바 구딩 주니어(45) 등이 흑인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중을 가리지 않고 적극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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