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애국가 친필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과 민주당 안민석 의원, 경희대 김준혁 교수 등은 지난 31일 미국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 도서관을 방문, 애국가 작사가로 유력한 윤치호의 친필본 애국가를 확인했다. 이날 조사단은 애국가 친필본은 물론, 윤치호 일기 등 소장 자료들을 열람하고 기증관련 서지사항을 확인했다. 애국가 친필본을 비롯한 문서들은 1990년 윤치호 유족들에 의해 윤치호의 모교이기도 한 에모리대학에 기증된 것들이다.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에는 현재의 애국가와 거의 일치하는 가사가 4절까지 적혀 있으며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희(친히) 써주신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혜문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이 문서는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10월 작성되었지만 일단 유력한 작사자가 스스로 밝힌 문서라는 점에서 애국가 작사가 규명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사료적 가치를 평가했다. 안민석 의원(민주당)은 “해방직후인 1945년 9월에 윤치호 친필본이 작성된 배경과 경위에 대해서도 충분한 조사가 필요하다”면서 “당초 알려진 바와 달리 에모리대학측이 친필여부에 대해 아직 과학적 검증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했다”며 필적감정 등 추가 검증의 가능성도 제기했다. 안민석 의원은 “이번 현지조사가 2015년 8월 15일 해방 70년을 맞는 시점까지 작사미상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열람에 관한 소회를 밝혔다. 열람을 마친 뒤 문화재제자리찾기측은 “윤치호 친필본 열람이 윤치호 애국가 작사가설을 옹호하거나,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가 심의 당시 중요한 증거로 논의되었던 문서를 확인하는 절차”라는 점을 강조했다. 1955년 4월13일 국사편찬위원회는 사계 권위자 13인들로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첫 회의를 하고 7월30일 해체하면서 윤치호를 대상으로 한 표결 결과가 11대 2로 만장일치가 되지 않았다며 ‘작자 미상’으로 남겨두었다. 이에 대해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최근 뉴시스 기고문을 통해 “국사편찬위원회가 결론을 내지 않은 것은 윤치호가 일제시대 말기 친일행위로 인한 국민적 거부감을 반영한 것으로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은 당시 40여건의 신문기사 표제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연갑 이사는 “윤치호가 1907년 애국적 발상에서 스스로 지은 것을 3·1운동 전 기간에 민중들이 한마음으로 불렀고,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이 채택함으로써 광복군에게도 불렸고, 이의 정통성을 승계하여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서 국가로 불러 오늘에 이르렀다”면서 “우리 스스로 애국가를 택하고 불렀으므로 작사가의 성향은 직접적이지 않다”고 강조했다. 즉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육당 최남선의 ‘독립선언서’를 오늘의 3·1절 기념식에서 우리가 낭독하고 있는 것과 같은 논리”라는 것이다.한편 안민석 의원은 이번 방문에서 또다른 작사자로 거론되는 안창호 선생의 자료 조사를 위해 딸 안수산 여사(100세, 로스엔젤레스 거주)를 면담했다. 이를 통해 향후 정부와 학계, 관련기관 및 윤치호, 안창호 유족들과 함께 정확한 고증과 토론 및 협의를 거쳐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고, 2015년 8월 15일 해방 70주년 기념식 이전에 정부 차원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확정 발표하도록 촉구할 예정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