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 움추렸던 몸이 차츰 풀리기 시작하면서 가까운 지역으로 가족단위 봄맞이 나들이가 한결 쉬워졌다. 특히 주말을 이용하는 자녀들과의 문화탐방은 그야 말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다. 이번주말에는 당일코스로 대구근교의 명소로 알려지고 있는 찬란했던 고령지역 대가야 고분군을 찾아보면 어떨까. - 편집자 주 -  대구에서 승용차로 30~ 40분이면 갈 수 있는 고령. 대가야 역사의 흔적이 숨쉬는 고령은 대구 근교에서 가장 역사성이 있고 자연미와 인정미가 넘치는 살고픈 지역이기도 하다. 대가야의 왕릉군과 선사시대 암각화 등 30여곳의 크고 작은 유적지와 관광지가 산재해 있는 말대로 가야 유적지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고령이다. 역사의 줄기를 거슬러 올라 가야문화의 옛 자취를 한번 더덤어 보자.   ▲대가야왕릉전시관과 지산동 고분군  왕릉전시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순장묘인 지산동고분군 44호 고분을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다. 순장이란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행위. 전시관 중앙에는 발굴 당시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어 옛무덤에 대한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전시관 옆에는 대가야박물관이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왕릉전시관을 나와 뒷산으로 10여분 정도 올라가면 지산동 고분군이 나타나면서 시선을 압도한다. 가야 최대의 고분군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령읍을 감싸는 주산의 남동쪽 능선을 따라 20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고분군 사이로 걸어가는 길은 산책길. 길도 가파르지 않고 중간 중간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 쉬어갈 수 있도록 꾸몄다. 간간히 불어오는 솔바람은 아직 차갑긴 하지만 기분이 무척좋다. 꼭대기에 서면 고령읍이 한눈에 펼쳐진다.  ▲고령은 우륵의 고향 고령은 왕산악, 박연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리는 우륵의 고향. 현의 노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우륵이 가야 12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고령읍 쾌빈리 야산에 우륵을 기념하는 탑과 영정을 모신 비각이 세워져 있다.  ▲암각화 고령에는 가야문화만 있는 게 아니다. 1971년에 발견된 개진면 양전리 암각화는 선시시대 문화체험에 도움이 되는 역사 유적이다. 높이 3m, 넓이 6m의 산비탈 면에 위치한 바위를 들여다보면 동심원과 십자무늬, 탈 모양이 새겨져 있어 그 섬세함은 눈을 의심할 정도다.  ▲대가야문화학교  산(山) 사이로 달이 뜨는 마을, 바로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시골분교의 정취가 흠뻑 묻어나는 이곳에 전통문화체험학습장인 ‘대가야문화학교’가 자리하고 있있다.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과 가훈, 명언 등을 직접 판각할 수 있고, 대가야 문화유적을 탐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이 직접 판화를 만들어 볼 수 있으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인쇄문화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대장경 체험 프로그램과 함께 한지 공예, 다도교실, 사물놀이, 민요 배우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개실마을  쌍림면 합가1리에 있는 개실마을은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350여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일선 김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ㅁ’자형 종택 뒤로는 대나무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앞마당이 넓은 게 특징이다. 뒤편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고령시장  어김없이 4일과 9일, 14일과 19일, 24일과 29일이면 열리는 고령닷세장은 시골장 치고는 그 규모가 제법 크다. 이곳은 말대로 "없는것 빼고는 다 있는 시골장터"다. 장날이면 어물전, 과일전, 곡물전, 채소전, 잡화전 등이 늘어선다. 장터에서 옛 시골장의 분위기를 맛보려면 난전을 찾아야 한다. 난전은 시골할머니들의 몫이다. 시장 입구마다 보따리 보따리 풀어놓고 차린 장마당에는 계절을 반영하듯 이른 봄나물이 풍성하다. 텃밭에서 뜯어온 냉이, 달래, 씀바퀴, 돌나물 등 흙냄새 섞인 봄나물들이 보따리마다 소담스럽게 담겨있다.  여기에는 저울도 없다. 한 움큼씩 판다. 단돈 1천, 2천원이면 덤으로 한 봉지가 안겨진다. 농산물은 할인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싼데다 푸근한 인심을 함께 할 수 있어 신세대 주부들도 즐겨 찾는 인심이 후한 장터다. 물건 값을 흥정하는 모습, 무쇠에 국밥을 끓이는 아주머니, 구수한 음식냄새 등 정겨운 모습들이 옛추억을 더듬게 한다.  ◇가는 길  대구- 88고속도로- 성산IC에서 빠져나와 국도를 따라 금산재를 넘어 고령읍으로 가면 된다. 조금 빨리 가는 길도 있다. 성산IC에서 빠져나와 새로 난 4차로 국도를 타고 금산재를 터널로 통과하면 차량이 밀리지 않고 한결 수월하다.  ◇`대가야체험축제’  ‘대가야체험축제’는 해마다  4월 초순 무렵이면 고령읍 왕릉전시관 및 박물관 일원에서 열린다. 군민의 날을 겸한 이날 선포식을 시작으로 펼쳐지며 축제는 대가야 문화 체험뿐만 아리라 암각화체험, 무덤체험, 전통한식마을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꾸며져 인근지역 시군민들로 크게 붐비기도 한다.  이축제는 체험위주의 행사가 많은 것이 특징. 축제장 안에서는 대가야의 순장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실물크기의 재현된 순장무덤의 모형에 누워 대가야 시대의 순장에 대한 공포를 체험할 수 있다. 또 대가야 고분 발굴과정에 참여하는 고대유물발굴체험과 대가야 고분의 축조술을 체험할 수 있는 고분축조체험도 마련된다.  고령 특산물 딸기농장체험도 할 수 있다. 체험비를 내면 원하는 만큼 딸기를 따고, 현장에서 따먹을 수 있으며 직접 딴 딸기를 집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전통마을에서는 엿 만들기, 한과 만들기 등의 체험과 함께 마을장터에서 특산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 외 암각화 체험과 대가야 토기체험, 가야금 제작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      *      *      *      *                                   ◈고령지산동고분군(高靈池山洞古墳群)   고령은 대가야의 옛 지역으로서 현재 무덤이 수백 기에 이른다. 그 중 지산동 무덤들은 겉모습이 확실하고 봉분이 비교적 큰 무덤에 한하여 번호를 매겨 지금은 72호 무덤까지 정해져 있다. 이들 무덤의 겉모양들은 모두 원형의 봉토를 하고 있고, 봉토의 규모에 따라서 대형·중형·소형무덤으로 구분한다. 봉토는 흙을 높이 쌓아 무덤의 형태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로 대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위쪽에 많이 있으며 중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중간 정도에 모여 있고, 작은무덤들은 대형무덤과 중형무덤 주위나 그 밑에서 발견된다. 내부구조는 돌널무덤(석상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돌널무덤의 경우 청동기시대 돌널무덤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 봉분 안에 여러 무덤이 나타나는 것은 가족무덤의 성격이라기 보다 딸려묻기(순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형무덤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갑옷 및 투구·칼 및 꾸미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4∼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이란  지산동고분군은 경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분포하는 거대한 무덤들의 집합체를 말한다. 이 고분군은 고령읍을 감싸는 주산성(主山城)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과 가지 능선에 걸쳐 넓게 퍼져 있다. 주산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 위,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크고 작은 고분 수백 기가 남아있다. 이 고분군은 고령뿐만 아니라 가야지역 전체에서도 가장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써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산동고분군에 대한 첫 발굴조사는 1906년 세키노(關野貞)가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구로이타(黑板勝美), 이마니시(今西龍), 사이토(齊忠) 등의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에 참여했으며 그 후 1976년 고령군 공보실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 정화작업 이후 외형이 확실하고 비교적 큰 고분에 한해 일련번호를 매겼다. 이 가운데 44·45호분은 1977년 경북대와 계명대의 합동발굴조사단이 발굴, 조사를 했고, 32·35호분은 1978년에 계명대에서 조사했다. 지산동고분군이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인 44분과 45호분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묘제상 중요한 자료인 이들 순장묘가 발굴됨으로써 한국고대사에서 문헌상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순장 기록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44호분에서는 30여 명 이상의 순장자가 묻혀 있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지산동고분군의 주된 무덤 형식은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이다. 이 고분군의 무덤들 가운데 3기만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이들 고분군에서는 `고령식`, `대가야식`으로 불리는 여러 종류의 토기류와 철제의 이기(利器), 마구류, 고령의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금동제 관장식, 금은장신구, 옥류, 청동제 거울, 청동합(靑銅盒) 등 최고급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여지는 등잔도 출토되어 대가야가 이들 국가와 대외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의 기록으로 이 고분군은 대체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산동고분군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32호 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 이관은 관대의 앞면에 반월모양의 장식물을 세워 두었는데, 그 세움장식에는 꽃가지 모양의 장식이 좌우로 각각 하나씩 달려 있다. 일본의 후꾸이현 니혼마쯔야마 고분에서 이 32호분 출토 금동관과 같은 계보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금동관이 출토된 적이 있다. 대가야와 일본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형의 금동관들은 5세기 무렵에 두 나라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아주 귀중한 유물이다.  ▶ 지산동 44호분은  지산동 44호분은 주산이 경사져 내리는 끝 부분의 비교적 넓고 평평한 땅에 걸쳐 있어 다른 고분들보다 더욱 우뚝 솟아 보이는 곳에 있다. 고분의 아래쪽은 급경사여서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위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고 완만하게 경사가 져 있습니다. 45호분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다.  이 고분은 가운데에 으뜸돌방〔主石室〕1기와 딸린돌방〔副葬石室〕2기의 큰 돌방〔石室〕을 만들고, 주위에 작은 돌덧널〔石槨〕32기를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다음 타원형 둘레돌〔護石〕로 이들 모두를 둘러싼 다곽분(多槨墳)이다. 순장자는 32기의 작은 돌덧널에 순장되어 있고, 그 외에 으뜸돌방과 딸린 돌방에도 1명 이상씩 묻혀있어 적어도 36명 이상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도굴로 인해 매장 당시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뚜껑접시, 그릇받침 등의 토기류는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딸린돌방인 남쪽 돌방에는 대형그릇받침 18개가 집중적으로 나왔다. 이밖에 투구를 비롯한 철제무기류, 말띠드리개, 금제귀걸이, 청동그릇과 다양한 종류의 옥 제품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이는 등잔 한 점과 일본 오키나와제도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왔다. 이 유물들은 대가야가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기록으로 볼 때 이 고분은 5세기 중,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있다.   ▶ 지산동 45호분은  45호분은 주산이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 뻗기 시작하는 돌출부에 위치해 있다. 44호분에서 산 위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 고분은 가운데 두 개의 큰 돌방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외곽에 11개의 돌덧널을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한 다곽식 무덤이다. 돌덧널 외곽에는 둘레돌을 둘렀다. 으뜸돌방은 암반을 깊게 파고 네 벽을 큼직한 깬돌〔割石〕로 고르게 쌓았는데, 길이와 너비의 비가 4.5 : 1인 좁고 긴 구덩식돌방이다. 이런 모양의 돌방은 고령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가야양식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45호분의 규모는 긴 지름이 28.2m, 짧은 지름이 25.7m, 뚜껑돌〔蓋石〕위에서의 높이는 2.8m. 도굴로 껴묻거리의 상당수가 없어졌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유물이 꽤 있다. 굽다리접시 등의 각종 토기류를 비롯, 금동관식(金銅冠飾), 금제귀걸이, 말안장, 재갈, 말띠꾸미개, 은으로 장식된 고리손잡이큰칼의 손잡이부분, 쇠창, 각종 청동제품 등이 으뜸돌방에서 나왔다.  이 무덤 역시 순장묘로, 11기의 돌덧널 외에 으뜸돌방에 2명 이상, 딸린돌방에 1명 이상의 순장자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도 금귀걸이와 목걸이를 걸고 있어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순장했으리라고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문을 품게 했다. 이 무덤은 대략 5세기 중, 후반경에 만들어졌으리라고 보고 있다.  ▶ 지산동 32호분은  32호분은 큰 무덤들이 자리하는 주산의 주능선이 급경사로 내려와 넓고 평평한 형상을 이루는 구릉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32∼35호분으로 이름 붙여진 4기의 고분이 300여 평의 면적 안에 서로 2∼3m 간격을 두고 모여 있다.  이 고분은 묘역 가운데에 돌방 1기와 돌덧널 1기를 나란히 배치한 다곽분으로, 주위에 길이 11.2m의 타원형으로 둘레돌을 돌려 놓았다. 봉토는 긴지름이 13.1m, 짧은지름이 12.6m, 높이는 뚜껑돌 윗면에서부터 1.5m. 돌방은 두껍고 납작한 직사각형의 깬돌로 네 벽을 엇물리게 쌓았으며, 넓고 편평한 깬돌 10매로 뚜껑돌을 덮었다.  32호분에서는 뚜껑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바리형그릇받침, 큰 합 안에 작은 합들이 들어있는 모자합(母子盒) 등의 토기류와 갑옷과 투구, 고리손잡이큰칼, 발걸이, 청동방울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나뭇가지모양의 세움장식을 한 금동관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돌방 가운데에 안치된 나무곽 속에 동북방향으로 눕혀 있었으며, 껴묻거리의 성격으로 보아 남성으로 생각된다. 주인공의 발치쪽 껴묻거리 속에는 또 한사람의 피장자가 있었는데 순장된 사람으로 추정된다. 순장자는 돌방에 1명, 순장 돌덧널에 1명으로 총 2명이 확인되었으며 이 고분은 5세기 중반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 순장(殉葬)이란.  순장이란 부족장이나 왕, 또는 가장이 죽었을 때, 생시에 가까이에서 그를 모시던 신하나 시녀, 사랑했던 처나 첩 등을 함께 매장,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시중들고 생활할 수 있게 했던 제도. 이것은 고대사회 때 성행했으나 사회가 발전하고 인간애가 성장하면서, 사람 대신 흙으로 만든 인형인 토우나 토용을 묻는 식으로 변화되었다. 고대시기에 우리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순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해 밝혀졌다. 중국과 일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 인도, 멕시코, 남태평양의 섬 지역 등 다른 지역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왜 죽은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죽어야하는 비인간적인 풍습이 고대시기에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시행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 즉 죽은 다음의 세상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 우리들의 그것과 아주 달랐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오늘날 우리들은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현재의 삶이 계속 그대로 이어진다고 하는 계세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살아 생전에 왕을 모시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그를 따라 가 영원히 섬겨야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순장이 이루어졌던 배경에는 이런 종교적, 사상적인 면 말고도 정치적, 사회적인 면이 있었다. 죽은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산 자들을 함께 묻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은 자의 권력이 매우 강력했고 또 절대적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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