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전을 만나러 시간여행을 떠난다 *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 영주(榮州)로 `일상탈출` 행선지를 정한 건,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한 공중파 방송의 주말연속극 `정도전`의 생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우기 시대를 건너 뛰어 선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도 되새겨 보고 싶었다. 때마침 정도전이 유년기를 보낸 곳으로 알려진 `삼판서 고택`을 최근 많이 찾는 관광객을 위해 관광해설사도 전담 배치됐다. 물론, 영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소수박물관, 무섬 전통마을 여행을 빠트릴수는 없다. 번민의 연속인 어지러운 속세를 잠시 벗어나 `전통과 선비`의 마을 영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 편집자 주 - ■선비촌과 소수서원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서원으로 수많은 명인을 배출했으며 또한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소재지 : 경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사적 제 55호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선생이 고려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했다.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 · 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회헌 안향(1243∼1306)선생은 고려 원종 원년(1260) 진사과에 급제한 후 우사의(右司議)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이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고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 ·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서고,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창건유래  고려후기의 학자 회헌 안향(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이하 회헌이라 함)은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년간 벼슬길에서 두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한 공헌도 공헌이려니와, 그 중에도 회헌 선생 다운 바는 문교(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있음은 이를 나위도 없으리라. 당시는 불교 · 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도입하여 연구하고, 장려하는 등,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은 분이 회헌이다. 신재(愼齋)주세붕(이하 신재)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만에 회헌의 고향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신재는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경내에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탄(贊嘆)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順興誌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남짓 땅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1544)년 9월 1일에 안축 · 안보(安軸 · 安輔:회헌의 三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받들게 했다. 함께 선비를 기르기 위해 서당을 설치하고, 토지와 곡식으로 운영기금을 세울새, 고장 선비 進士 황빈(黃彬)이 벼 70석을 내어 도왔다. 고을의 生員 몇사람과 고을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관리와 운영을 맡게 하여, 여기서 학문을 탐구할 선비를 불러 모으매, 사방에서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신재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영전되는 명종1년 乙巳(1545)에 회헌의 후손인 설강(雪江) 안현(安玹)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자, 이 서원에 와서 사당에 참배하고, 선비를 공궤함에 불편이 없도록 시중들 하인을 늘리고 경비를 크게 돕는 등 서원의 설비를 충실히 했으며, 그로부터 본도의 감사들은 이 서원에 한결같이 마음을 써,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부석사 무량수전부석사불교사적위치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소개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입니다.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안에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소재지 :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전화 : 054)633-3464 부석사 홈페이지 : http://www.pusoksa.org/ 유래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이다.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해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기록돼 있다.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다.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다. 소수박물관에서 봉화 쪽으로 20여 분쯤 거리에 아름다운 목조 건물의 대명사 부석사(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가 나타난다. 국보 제18호 무량수전과 무량수전 앞 석등(17호), 조사당(19호), 소조여래좌상(45호) 등 국보니 보물이니 하는 것들도 중요하겠지만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고 최순우 선생의 유작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창비) 등에서도 언급되던 무량수전 안양루에서 내려다 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산 능선이 겹겹이 포개지면서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정도전 생가로 알려진 삼판서고택 정도전(鄭道傳, 1342~ 139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유학자이자 시인이며,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였다  정도전의 생가로도 알려진 삼판서고택(영주시 선비로 181번길 56-1)이 있다. 최근 `정도전` 드라마가 뜨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삼판서고택은 도립영주공공도서관 뒤편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구학공원 내에 복원돼 있다. 원래 삼판서고택은 구성공원 남쪽(현 영주동)에 있었지만 1961년 대홍수 때 기울어져 철거되었다가 2008년 10월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삼판서고택 옆에는 정도전과는 대립 관계에 있던 하륜이 군수 시절 세웠다는 제민루가 우뚝 솟아 있다.   삼판서고택으로 들어서면 `집경루`(集敬樓·한마음으로 조상을 공경하자)와 `소쇄헌`(掃灑軒·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이라는 두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고택에선 형부상서를 지낸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1305~1366)을 비롯, 그의 사위 공조전서 황유정 등 판서급 5명, 문과 8명, 무과 1명, 소과 2명 등 수많은 학자와 명신들이 배출됐다. 정도전 역시 몇 차례의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 삼판서고택에서 심신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영주시는 "한때 정도전의 출생지가 단양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부친 정운경의 묘가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고, 정도전이 시묘살이를 하던 초막이 문천서당이 된 것 등만 봐도 영주가 고향인 것은 틀림없다, 앞으로 정도전이 제대로 조명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밝혔다.■무섬마을  영주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20여 분 거리에 무섬마을(영주시 문수면 무섬로 234번길)이 있다. 자연환경;북서쪽으로 소백산맥이 기호지방과 경계를 이루며 뻗어 있고, 국망봉(國望峰, 1421m), 소백산(小白山, 1440m) 도솔봉(兜率峰, 1314m), 선달산(先達山, 1236m), 연화봉(蓮花峰, 1394m), 어래산(御來山, 1064m) 등이 연봉을 이루며 솟아 있다. 이 밖에 불로봉(不老峰, 482m), 노인봉(老人峰, 377m), 대마산(大馬山, 375m) 등의 비교적 낮은 산들이 분포해 있고, 기호지방과의 교통은 주로 죽령(竹嶺, 689m)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천은 소백산에서 발원하는 남원천(南院川), 내성천(乃城川), 죽계천(竹溪川), 감천천(甘泉川) 등 낙동강 지류가 흐르는데 이들 하천유역에는 비교적 비옥한 침식분지가 발달해 있다. * 희방사 풍기에서 죽령을 향해 차로 10분쯤 달리면, 소백산 희방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길로 접어들면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지는데 바로 희방계곡이다. 여기서 다시 30분쯤 걸어 올라가면 높이 28m의 웅장한 희방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소재지 :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전화 : 054)638-2400 유래 희방폭포는 소백산 연화봉 밑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몇천 구비를 돌아돌아 흐르다 이곳에 멈춰,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웅장한 폭포를 이룬다.무더운 여름철, 우거진 잡목과 시원한 폭포가 어우러진 희방폭포는 일등 피서지가 되고 있다. 폭포를 뒤로 하고 한구비 오르면 고요한 정적속에 희방사가자리잡고 있다. 희방사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두운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어느날 두운조사가 산길을 가다 신음하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 호랑이는 사람을 먹고 목에 비녀가 걸렸는데, 두운조사가 비녀를 빼주고 호랑이를 살려줬다. 그 후 호랑이는 두운 조사의 은혜를 갚고자,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다.그 규수는 바로 경주호장(慶州戶長)의 무남독녀였다. 경주호장 딸을 살려준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코져 이 절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 두운조사의 참선방이란 것을 상징하는 방(方)을 써서 희방사(喜方寺)라 이름지었다.당시, 경주호장은 이것으로도 은혜에 대한 보답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죽령고개 아래 마을 계곡에 무쇠다리를 놓아 주었는데, 지금도 고개 밑의 마을을 수철동(水鐵洞)이라 부른다.희방사는 6.25 전란으로 법당과 훈민정음의 원판과 월인보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었다. 그 후, 1953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은은한 종소리로 유명한 희방사 동종이 보관되어 있다.  * 비로사  비로사(毘盧寺)는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산사이다. 680년(문무왕 2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고찰로서 불상, 비,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있어 이 절의 깊은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맨 먼저 비로사 입구 좌측 위에는 영주삼가동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4.8m 높이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양 지주의 내측면은 평평하고, 전 후면에는 가장자리와 중심부를 따라 띠가 조각되어 있다.소재지 :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390 전화 : 054)638-5033 유래 또, 간을 받치는 간대석과 간을 삽입하는 구멍이 있어 전체적으로 치밀한 구조를 보여준다. 비로사 경내에 들어서면, 거북 받침 위에 비신을 세운 비석이 하나 눈에 띈다. 바로 진공대사보법탑비이다. 진공대사는 신라 왕계(王系)의 자손으로 가야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937년(태조 20)에 태조에게 나아가 후삼국의 통일을 축하하고 열반하였다. 이에 태조는 진공(眞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로사에 보법탑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또, 영풍 비로사 석아미타 및 석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에 조성된 불상이다.석비로자나불좌상은 단정하고 아담한 체구, 둥근 얼굴, 생기있는 어깨선 등에서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석아미타불 역시 석비로자나불좌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동일 작가에 의해 조성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귀중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비로사는 소백산 비로봉이 장쾌한 전경과 함께 길손의 기쁨을 더해 주고 있다.* 초암사  죽계구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기슭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초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사찰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세우고자 산수좋은 이곳에 초막을 지어 임시거처를 정하고 명당자리를 골라 부석사를 세운 뒤 초막을 지었던 곳에 절을 지어 초암사라 했다. 초암사는 6.25의 병화를 맞아 쇠락해 있던 것을 이보은 스님의 각고의 노력끝에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도유형문화재인 3층석탑 등이 있다. 초암사는 소백산의 그윽한 정취 속에 깃든 청정도량으로, 세속의 잡다한 생각을 버리게 하고 고요한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준다.소재지 :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524 * 성혈사  성혈사(聖穴寺)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의상대사가 초암사(草庵寺구)에서 수도하던 중, 장소가 불편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 소재지 :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277  “성혈사”라는 이름은 절 아래 300m 쯤 성인이 나온 암굴이 있어 성혈사(聖血寺)라 명명하였다. 성혈사에는 꽃살 창호로 유명한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성혈사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 한 단층 맞배 집으로 임진왜란 이후 중창되었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으로 자연미를 살렸으며, 정면 3칸의 창호(窓戶)를 꽃창살호로 장식했다. 특히 창호의 어칸(御門)부분은 연못에 게, 물고기, 동자상, 여의주, 기러기, 등을 조각하여 진풍경을 이루고 있다. * 흑석사  흑석사(黑石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사찰 인근에 검은 빛깔의 바위가 있어 흑석(黑石)이라 불리는 마을의 이름을 따와 흑석사라 하였다. 임진왜란에 병화를 입어 폐찰되었으며, 1945년 초암사의 김상호 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초암사 재목을 옮겨와 중창했다. 이곳에는 목조아미타불좌상과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정암산 법천사에 있던 불상으로, 8.15광복 이후 흑석사로 옮겨왔다. 원래 삼존불상 가운데 하나로, 수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복장유물로 청색명주와 백지에 불상 제작년대와 조성에 참가한 인물명을 기록한 아미타삼존복장기, 불상을 조성하기 위한 권선문과 시주첩(始主帖)인 백지묵서법천사아미타불삼존조성보권문(白紙墨書法天阿彌陀佛三尊造成普勸文), 부모에 대한 효도와 죄를 멸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도리를 설법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목판본(佛說大報父母恩重經木坂本) 등의 전적과, 복장용 사리, 오곡, 오향, 칠약 등이 있다. 흑석사 석조여래좌상은 대좌광배를 모두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다소 움츠린 듯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신체구조를 보여주며, 얇은 옷주름, 잘쑥한 허리 등으로 굴곡을 표현하고 있다. 대좌와 광배 부분에 연꽃, 구름, 화염(火焰), 안상(眼象) 등이 다채롭게 장식되어, 9세기 석불좌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소재지 :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1380  * 소백산 우리나라에서 열여덟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  풍기읍 수철리에 소재하며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영남지방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백산에서 서남으로 갈린 산맥이 구름위에 솟아 경상도·강원도·충청도 3도의 경계를 지으면서 서남쪽으로 구불구불 백여리를 내려 뻗어 일으킨 소백산은 영주·예천·단양·영월 네 고을의 배경이 되어 고장의 평화와 행복을 수호하며,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맑고 수려한 기상의 영기(靈氣)어린 성산(聖山)이며, 또한 지맥의 흐름으로는 한반도의 척추 부분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다.  특히, 소백산 허리를 감돌아 오르는 아흔아홉 굽이의 죽령(竹嶺)은 영남의 3대 관문중 하나로서, 그 옛날 과거길 선비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1,439m)에는 천연기념물인 주목(朱木)이 군락을 이루며,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고장 선비들이 한양의 궁궐을 향해 임금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했다는 국망봉(國望峰)(1,421m)과, 소백산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蓮花峰)(1,394m), 그 옛날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솔봉(1,315m) 등많은 산봉우리들이 연이어져 있으며, 소백산 중턱에는 신라시대 고찰 희방사(喜方寺)와 비로사(毘盧寺)가 있고, 희방사 입구에는 영남 제일의 희방폭포(28m)가 년중 시원한 물줄기로 피서객들을 즐겁게 맞고 있다. 특히, 해마다 5월이면 철쭉꽃의 장관과 상수리나무 숲 터널은 소백산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으며, 년중 6개월 정도 백설로 뒤덮혀 있는 비로봉은 『한국의 알프스』로 불리워져 오고 있다. 소재지 : 영주시 풍기읍 죽령로 1720번길 76 (수철리 산 86-1) * 죽계구곡소개 죽계구곡은 고려후기의 명현이자,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이며, 이퇴계와 주세붕 등 조선시대 유현들이 유상하던 자취들이있어 잘 알려진 계곡이다. 죽계구곡은 초암사 앞에서 제1곡으로 시작되어, 시냇물을 따라내려 삼괴정을 못미쳐있는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5리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이 죽계구곡은 영조초에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가 처음 정한 바인데 옛 초암법당 앞 바위벽에 “죽계1곡(竹溪一曲)”이라 커다랗게 새겨있고, 시냇물이 넓게 고여 흐르는 물밑 반석에 행서로 세겨진 “제일수석(第一水石)” 4자는 아주 힘차고 활달한 글씨인데 오랜 세월에 갈려 겨우 알아볼 지경이다.지금 우리가 죽계구곡으로 발길을 돌리면 옛 선현들이 그곳에서 받은 감흥을 고스란히 늘낄 수 있다. 아니 늘 콘크리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자연이 주는 감동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은 더 큰 위안과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계곡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 울창한 푸르른 숲, 그사이로 보이는 하얀 바위들, 이들이 모여 빚어놓은 죽계구곡은 어느지점에서든지 주저앉아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죽계구곡을 찾고, 가을에는 계곡물 위에 떠도는 한잎의 붉은 낙엽을 잊지 못해 죽계구곡으로 간다. 겨울의 등산객은 살짝 얼어붙은 계곡물 밑으로 느껴지는 생명력을 배운다. 사철 어느 때라도 찾고 싶은 소백산 죽계구곡 한마디로 ‘산 좋고 물맑고, 하늘 높은 곳이다. 죽계구곡은 자연경관만 빼어난 곳이 아니라, 계곡을 따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어 역사의 향기도 함께 느낄 수 있다  * 죽령옛길소개(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0호 지정, 2007.12.17)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 696m의 죽령.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습니다.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쫓기고 엎치락 뒤치락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漆夫) 등 여덟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삼국사기)으로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이었음을 짐작할 만합니다.서기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길을 이용했기에,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이며,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목목이 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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