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도 `겨울왕국`처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춘향아`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꽃이 날린다거나 무대효과를 더하는 거죠. 우리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지난해 10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안숙선(65) 명창은 젊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춘향과 심청 등 주요 배역을 도맡아 `국악계의 프리마 돈나`로 불리지만, 아직도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지녔다. "감독이라는 보직보다 저는 저를 아티스트라고 생각해요. 여기 오면서도 감독만 하면서 2년을 보내는 건 제게서 너무 많은 걸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고 국악원에 연습실을 달라고 했어요. 충분히 지원하겠다는 말에 오게 된 거죠. 하루라도 노래를 안 하면 녹이 슨다고 생각해요."국악 명가에서 태어나 아홉 살의 나이에 가야금을 배우며 일찍부터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 태평무 인간문화재 강선영·가야금 명인 강순금이 이모,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이 외삼촌,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이 어머니의 사촌인 환경에서 듣고 자란 것이 국악이다. "노래하다 보니 봄이 왔고 노래하다 보니 여름, 가을, 겨울이 갔다. 기운이 받쳐 줄 때까지 노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돌아보는 명창의 하루는 여전히 짧다. 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으서의 역할과 명창으로서의 본분을 모두 수행하기 위해서다. "더 좋은 소리를 해야 하는데 이제는 겁이 나요. 기운 없는 소리를 관객이 듣고 힘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1986), KBS 국악대상(1987),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3), 한국방송대상(1995), 프랑스문화부 예술문화훈장(1998), 옥관문화훈장(1999) 등 열거하기 힘들만큼의 수상경력이 길기만 하다. 1970년대부터 국가의 주요 행사에서 부른 `아리랑`의 횟수도 셀 수 없이 많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리가 큰 건 더 크게, 깊은 건 더 깊게, 내쳐야 할 때는 정말 태산이 무너지게 하고 싶어져요. 소리를 하면 할수록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더 잡아야 할 것들이 있어요. 그런 재미가 없으면 소리를 못하죠. 목표가 있으니까 달려가야 하는 거예요."국악이 대중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 게 모두 자신의 탓인양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는다. 안 명창은 지난 달 대중가수와 국악인들이 함께 무대를 꾸민 KBS 1TV 특집프로그램 `K팝 국악에게 길을 묻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출연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죠. 장르를 넘나들며 소통을 해야 한다고 일찍부터 생각했죠. 교향악단 심포니와 협연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요. 그때는 교향악으로 편곡된 사랑가를 불렀는데 교향악단에 있었던 분들이 굉장히 좋다고 말씀해주셨어요."`K팝 국악에게 길을 묻다`에서 안 명창은 가수 최백호와 함께 단가 `사철가`를 불렀다. "내공이 있어서 그런지 잘 부르시더라고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앞으로는 멋있는 대중가요도 불러보고 싶어요."수장으로 있는 민속악단의 변화가 감지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민속음악이나 민속연희, 판소리나 민요들이 만들어졌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어요. 전통을 없애거나 변형시키겠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통을 무대 기법이나 그 외의 것으로 멋있고 아름답게 만드느냐를 고민하고 있습니다."시간을 두고 온 대중과의 간극이 쉽게 좁혀질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지 않았다. 안 명창은 전국 곳곳의 소극장에 국악 무대를 지속해서 올리는 `소극장 운동`을 구상하고 있다. "물론 우리 음악을 이해한다는 게 대중음악보다는 어렵겠죠. 생활 속에 우리 국악이 자리 잡아야 돼요. 예전에는 민속음악이라는 게 대중들 코앞에서 이뤄졌거든요. 서양식의 큰 극장이 아니라 작은 극장을 가지는 게 꿈이에요. 작은 극장과 작은 공연단을 꾸려 대중들이 가까이에서 늘 만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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