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쭉한 목소리로 포크록을 진두 지휘했던, 여전히 호령하고 있는 한대수(66)는 사실 겁쟁이다. "대학교 1학년은 무난하게 지나갔어요. 문제는 2학년 때였죠. 수술하면서 제가 겁이 많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완전 겁쟁이였어요. 피부를 째는 걸 못 보겠더라고요. 할아버지한테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죠."목장을 물려준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미국 뉴햄프셔 주립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며 겪은 일이다. "처음에는 땅도 넓고 산도 있고 해서 목장에서 말이나 타고 맥주나 마시면서 기타를 칠 생각에 들떴죠. 목장을 준다니요!(웃음)"목장을 운영하려면 소를 직접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별거 있겠어?` 했지만, 수의학과를 다니면서 힘들었다. 주춤거리는 자신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게 해부 실습에서 칼을 놀리는 여학생을 봤을 때 처음으로, 인공수정을 하다 소똥을 온몸으로 받았던 때 두 번째 회의가 들었다. 할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기로 했고, 한국에서 물 건너오던 지원은 이내 모두 끊겼다.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무얼 해야 할지 고민했죠. 그러다가 비치된 사진 잡지를 봤어요. 매력적이었죠. 그때가 60년대 말이었는데 막 사진이 예술화되는 단계였거든요. 소똥을 받을 게 아니라 향기나는 모델과 사진을 찍자, 암실에 가서 처박혀 있는 생활을 하자고 꿈꿨죠."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풀타임으로 일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서는 말 그대로 코피를 쏟으며 사진을 공부했다. 일하는 곳이 미국의 유명 레스토랑 `세렌디피티 3`인지라 유명인사도 종종 봤다. 그 중 한 명은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의 존 레넌(1940~1980)이다. "오노 요코와 음식을 먹으러 왔더라고요. 사인받을 엄두도 못 냈죠. 그냥 수줍게 `아이 러브 유어 뮤직`이라고 말한 게 다예요."한대수는 수많은 젊은이가 대학교는 언감생심, 산업전선에 뛰어들던 1960~70년대 국내 상황과 동떨어진 세월을 보냈다. 유명 사진가 유진 스미스, 에른스트 콜 등과 동문으로 미국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라피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한대수가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가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음악에 열중한 탓이다. "로큰롤은 마약이에요. 다른 건 신경을 쓸 수가 없어요. 앨범을 15개를 내고 공연하다 보니 정식 교육을 받은 사진이 고아가 된 거에요."뉴욕의 `컬러 하우스` `크로마 카피` `스피드 그래픽스` 등의 스튜디오에서 광고사진가로도 일했다. 너대니얼 리버먼 건축 스튜디오에 근무하며 베스트셀러 건축사진집 `맨해튼 라이트스케이프`에 참여하고, 코리아헤럴드에 사진기자로 출근한 이력도 특기할 만하다. "예전에 사진 작업할 때는 `하이포(hypo 정착액) 냄새를 못 견뎠어요. 코를 막고 작업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작업하면서 다시 그 냄새를 맡으니 옛날 향수도 느끼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겁니다."한대수가 5월7일부터 5월20일까지 서울 인사동 `리서울 갤러리`에서 마광수(63) 연세대 교수, 변우식(45) 팝아티스트와 함께 전시회를 연다. `꿈꾸는 삼총사`를 타이틀로 한대수는 15개 작품을 선보인다. 한대수가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2000년 개인전 `작은 평화` 이후 14년 만이다. "사진의 초심, 사진의 기본적인 의미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사진은 순간입니다. 저기 엎드리고 있는 남자, 저쪽 여자의 고민을 잡자, 사진의 근본으로 돌아가려 했죠."전시작 중 7점을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디지털카메라와 필름카메라의 차이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섹시한 모델과 파리의 카페에 앉아있는 고전적인 여인의 차이죠. 둘 다 좋지만 때에 따라 다른 셈이죠."전시회에 이어 60년대부터 담아온 50만장에 달하는 `순간`을 정리할 생각이다. 사진에 에세이를 더해 한국과 미국의 역사도 이야기하려 한다. "나이 드니까 무서운 게 없어져서 그런가 봐요."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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