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중심지 활약한대구 일제감정기역사 6·25전쟁예술인 할동 엿볼 수 있는 대구의 읍성골목… 대구읍성(大邱邑城)은 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에 있었던 읍성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선조 23년(1590년)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처음 쌓았던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대구부에 자리잡은 경상감영을 보호하는 치소로서 여러번 중수되다가, 외교권 피탈 뒤인 광무 6년(1906년) 10월, 당시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朴重陽) 등에 의해 불법 철거됐다.현재 대구시와 중구청은 읍성 및 대구 관아에 대한 복원 계획을 수립중이다.▣요새화한 성문 위용 드러내“우리는 그처럼 화려한 행렬을 이루며 도시의 내부를 오랫동안 둘러보았다. 나에게 성벽 위에서 한 번에 조망할 기회를 주기 위해 행렬이 성의 순시로를 돌았는데, 그 길은 베이징 성에 있는 것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평행사변형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각 벽면의 중앙에는 똑같은 규모의 요새화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의 내부는 과거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글귀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가을의 황금빛 들판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19세기 말 프랑스 지리(민속)학자 샤를 바라가 남긴 대구읍성 풍경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샤를바라 외, 조선기행, 눈빛, 2006, 166쪽)▣대구읍성 왜구 침략 대비, 축성대구읍성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영천, 청도, 성주, 진주, 동래, 안동, 상주성과 같이 만들어졌다. 원래는 토성으로 축조 (1591년,선조 24)됐다.하지만 1년 뒤, 임진왜란으로 파괴됐다.왜란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축조되지 못하다가 1736년(영조 12) 당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에 의해 성이 축조됐다. ▣6개월여의 공사 8만여명 참여대구 읍성은 1736년 1월 8일에 공사를 시작, 6월 6일에 여첩을 완성했다`고 기록돼 있다.공사 기간은 6개월로 연 인원만 7만8584명이 동원됐다. 이렇게 완공된 성은 둘레 길이가 2124보(2,650m), 여첩이 819개, 성 높이가 서남쪽 18척, 동쪽 17척에 이르렀다. 완공된 성에는 4개의 큰문과 2개의 작은 암문을 건설했다.네 모퉁이에는 동장대를 비롯한 4개의 장대(망루)가 있었다. ▣1907년 성(城)은 허물어지고경상도 관찰사 서리로 있던 친일파 박중양은 일본 거류민단의 철거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의 승낙도 없이 헐어버렸다.당시의 성벽돌은 사방으로 흩어져 옹벽, 축대, 주택기초석, 계단, 정원석 등에 두루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대구읍성 과 경상감영행정시설 감영이 설치된 이후의 주요 행정시설은 객사와 경상감영, 대구부 관아, 향청의 순으로 위계가 설정돼 있다. 공간 구조가 다른 읍성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경상감영이 추가 배치된 것이 다른 점이다.관아 배치에서 동편에 상급관청인 경상감영을 두고 서편에 대구부 본관이 배치됐다. 현재 경상감영공원 안에는 경상도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과 처소인 징청각이 남아있다.행정시설로 객사, 진영, 화약창, 수성창, 감옥이 있었으며, 행정시설이 없는 남서부와 남동부에는 주거지역이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4대문과 장대(망루) 읍성에는 영남제일문과 달서문, 공북문, 진동문의 4대문이 있었다.암문인 동소문과 서소문이다. 네 모퉁이에는 동장대(정해루), 서장대(주승루), 남장대(선은루), 북장대(망경루)등 장대가 있어 경계기능을 담당했다.4대문 중 유일하게 영남제일문이 동구에 있는 망우공원에 복원됐다.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가 달성토성 안으로 옮겨져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