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법정 명칭으로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은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탄생한 날로, 음력 4월 8일이다. 불교의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큰 명절로서, 기념법회·연등놀이·관등놀이·방생·탑돌이 등 각종 기념행사가 열린다. 우리니라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인도 등지에서도 연등놀이가 행해진다.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와서 중생들에게 광명을 준 날이라는 뜻이다. 오는 6일 불기 2558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명찰(名刹) 가야산 해인사를 미리 찾아본다. -편집자 주-          * 팔만대장경 *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불교의 힘을 빌려 원나라의 침략을 극복하고자 만든 불교 목판경이다.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 68 ~ 78㎝이며 폭은 약 24㎝, 두께는 2.7 ~3.3㎝ 안팍이다.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정도다.경판의 재질은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다. 1398년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로 옮겼는데 필체가 아름답고 8만장이 넘는 판본에서 오자가 없는등, 고려불교문화의 결정체이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대장경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지정 * 우리 민족의 문화재 가운데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족유산인 `팔만대장경`이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팔만대장경이 1251년에 완성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이 8만1258장(문화재청에서 밝힌 공식 숫자)이며 전체의 무게가 무려 280톤으로, 경판의 한 장 두께는 4cm, 8만1258장을 전부 쌓으면 그 높이는 3200m로 백두산(2744m)보다 높다는 것과 팔만대장경을 그대로 목판 인쇄해 묶으면 웬만한 아파트에 꽉 찰 정도로 거대한 분량이 된다는 것까지는 많은 이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경주 역사지구,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해인사 장경각, 고인돌, 석굴암과 불국사 등 7개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세계유산에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해인사 장경각이 포함된 것이지 장경각 안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지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팔만대장경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장경각보다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대상은 유적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팔만대장경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해인사에서 막연한 유물로의 팔만대장경만이 아닌 그 유물과 그러한 유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화적 유산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인식을 새롭게 다지길 바라고 있다.          *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대장경의 원래 뜻은 범어인 트리피타카(TRIPITAKA)가 말해주듯 ‘세 개의 광주리’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놓은 론(論), 이 세 가지 큰 광주리를 합쳐 대장경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경전 일체를 총괄하는 것이기에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한다. 경전은 부처님이 멸도하신 뒤에 부처님의 설법을 정리해서 성문화할 필요를 절실히 느낀 제자들이 모여 편찬한 것에서 비롯된다.이렇게 성립한 경전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소승경장과 대승경장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불교발달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처음으로 성립한 경전들은 부처가 멸도하신 후 4백여 년까지 4회에 걸친 결집(6회의 결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을 통해서 이른바 소승불교의 핵심 장경인 소승경장, 소승율장, 소승론장을 확립하게 된다.  이 경전들은, 기원전 4세기에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 마우리아 왕조가 설립되고 열렬한 불교 신자인 3대 아쇼카왕이 즉위하면서 국세가 비약적으로 팽창함과 더불어 널리 전파되어,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전 지역과 그리스 식민지인 박트리아, 나아가 스리랑카, 미얀마 등 남방 지방으로 퍼져나가 4세기경에는 남방불교의 기본 경전으로 뿌리 내렸다.  그 가운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래된 주된 불교경전은 이른바 대승삼장으로서, 이들은 부처가 멸도하신 후 600여 년 뒤인 기원전 1세기쯤에 일어난 대승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경전들이다. 부유층이나 왕실이 제공한 승원(僧院)을 중심으로 출가주의를 내세우며 경전을 연구?주석하면서 고답적인 독신주의에 치우쳐 있던 당시 불교계를 반성하고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재가불교도 중심의 이 대승불교운동은,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초월하여 널리 사회를 구제하려는 실천적 신앙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수많은 대승경전들을 출현시킨다.  1세기 후반에 북인도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기반으로 성립한 쿠샨왕조 제 3대 카니시카왕 때에 이르러 불교는 또 한 차례 흥왕기를 맞는다. 그이 적극적인 불교 보호 정책에 힘입어 대승불교운동은 중국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해서 학승들이 차례로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을 한역하는 데 힘을 쏟게 되었다. 『반야경』종류를 필두로, 『유마경』, 『법화경』 등의 유명 대승경전들이 차례로 나타나 한역되고, 그에 따라 대승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정착시키는 『중론송』같은 대승논장들도 등장하여 7세기쯤에 이르러서는 중국 및 한국, 일본에까지 대승삼장이 확고한 위치를 점하면서 한자문화권의 중요 문화요소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고려 팔만대장경의 성립 및 팔만대장경의 조성 동기고려팔만대장경의 조성은 고려 고종 19년(1231)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불에 타 소실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몽고는 끝까지 저항하는 고려를 침입, 대구 부인사에까지 쳐들어와 고려인의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대장경을 한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강화로 피난하여 임시 수도로 정하고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던 고려 왕실과 실권자인 최우(최이 催怡라고도 부른다)를 중심으로 한 군신들은 현종 때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위력을 빌어 외적을 퇴치하려는 대발원에서, 고종 23년(1236)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 조성사업을 결행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몽고의 침입으로 이전까지의 수도였던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를 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이 백성들을 버렸다는 불신감을 낳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장경 간행사업을 펼친 것이다. 이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민심의 수습과 “불교 문화국”으로의 부흥을 한꺼번에 꾀하게 된 것이다.          * 조성시기 * 팔만대장경판이 만들어진 시기는 문헌기록과 현 팔만대장경판의 각 권 끝에 나와 있는 간지(干支)에 의하여 명확히 밝혀져 있다. 고려사 고종 38년(1251) 9월 25일조에 보면 “현종 때 만든 초조대장경 판본이 임진년 몽고의 난 때 불타버린 후 임금과 신하가 도감을 세우고 발원하여 16년간에 걸쳐 경판을 완성했다. 이에 고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에 행차하여 낙성 경찬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낙성식을 거행한 고종 38년을 대장경판을 완성한 해로 보고 경판을 새기기 시작한 시기는 거꾸로 계산하여 추정해 보면 시기적으로 16년 전인 고종 23년(1236)이 되며 이에 따라 오늘날 우리는 팔만대장경판이 고려 고종 때 16년에 걸쳐 새겼다고 말하고 있다. 또 고종 24년에 쓴 이규보의『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에는 “이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귀당관사를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공사를 시작코자 하옵니다.”하여 이 해에 판각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의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에는 대부분의 경판이 각 권의 마지막 경판 맨 끝에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임,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등의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어서 실제 제작한 해를 알 수가 있다.  간지는 초조대장경에는 없는 팔만대장경만의 특징이고, 내용에서도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당당히 고려국 이라는 이름과 또 황제가 쓸 수 있는 용어인 봉칙(奉勅)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적어도 대장경판을 새기는 기간만은 몽골과 전쟁 중 이었으므로 우리의 역사 속에 항상 어깨를 짓눌러 왔던 대륙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국임을 경판에 아로 새긴 것이다. 그런데 경판에 새겨진 간지를 정밀 분석해 보면 경판을 새긴 기간이 고려사 기록에서 계산한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기간은 약간 차이가 있다. 실제로 판을 조성한 기간은 고종 24년(1237)에서 35년(1248)까지의 12년간이고 고려사의 기록 16년과는 4년의 차이가 있다. 또 연도별로 경판을 만든 양도 크게 달라 1243년의 3년간에 새긴 것이 3,816권에 이르러 대장경 전체 6,265권의 절반이 넘는 분량이다. 따라서 정확한 판각 기간은 16년이 아니라 12년으로 보아야 옳다고 생각되면 이와 같이 고종 35년에 실제적으로 경판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낙성경찬회가 3년이나 뒤인 고종 38년(1251)에 이루어진 것은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관하였던 최우가 고종 36년(1249)에 죽는 등 정치적 격동기를 겪었던 탓으로 보인다. 경판을 새기기 시작한 연도는 고려사에는 1236년, 이규보의 기록과 간지 분석결과는 1237년이어서 1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경판을 제작하는 데는 준비기간이 적어도 3~5년이 소요되었을 터이므로 경판을 새기기로 결정하고 목재 수집 등 착수한 시기는 1232년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린 직후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걷는다 * 긴 계곡에 끝없이 들려오는 계곡물소리..그래서 소리길이라 했는지 모르겠다고 모두들 이야기한다. 물소리,바람소리,새소리,절의 목탁소리, 소리길에서 가만히 귀기울여보면 많은 소리들이 들린다. 산책하는 산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도 들리고 계곡 건너편 차도에는 바삐 오가는 차들의 엔진소리도 들린다. 그런 소리들이 모두 계곡물소리에 섞여들어 햇살에 눈부시게 부서지는 하얀 물거품으로 사라진다.           * 가야산은...* 가야산국립공원은 자연생태계와 자연 및 문화경관 등을 보전하고 지속 가능한 이용을 도모하기 위해 1972년 아홉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은 일명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산 으로도 불리며 해발 1,430m, 상왕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깃대봉, 단지봉, 남산제일봉 등의 암석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가야산에는 멸종위 기 동ㆍ식물이며 가야산의 대표적인 깃대종인 삵과 가야산은분취 와 함께 많은 동ㆍ식물 자원이 풍부하게 존재하며 그 가야산 중턱에 위치한 법보종찰 해인사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과 세계기록문화유산 팔만대장경판을 보유함으로 자연과 문화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으로 그 가치가 매우 우수하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 큰 스님 * 성철(性徹: 1912년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1993년 11월 4일) 큰 스님의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 아호는 퇴옹(退翁)이다. 대한민국의 선종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典型)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승려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했으며 1936년 해인사(海印寺)에서 동산(東山) 대종사(大宗師)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雲峰)을 계사(戒師)로 보살계(菩薩戒)비구계(比丘戒)를 받았고서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과 함께 수행하면서 불타(佛陀)답게 살자고 결사(結社)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高揚)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리를 대상으로 한 성철의 견해는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노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 성철 큰 스님은 지행합일(知行合一) 단계의 지(知)만이 진정한 지(知)이고 지눌의 돈오점수는 실제(實際)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좇지 않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表象)에 경도(傾倒)되어 실증성이 희박(稀薄)하게 조직된 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主張)했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是非)를 가리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에게 불교 교의를 풀어서 밝혔고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했다.중국 대륙에서 임제종(臨濟宗)을 개종(開宗)한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선종의 내밀(內密)한 특징인 소위 도교에서 영향받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을 교시(敎示)하려는 취지(趣旨)로 한 설법(說法)인,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고측(古則)을 성철이 원용(援用)하여 인상(印象)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유명해졌다. -기획특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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