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강쇠전`으로 잘 알려진 판소리 `가루지기 타령`은 적나라한 성 묘사와 노골적인 음담이 전편에 깔려 있다.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는 영화 등 다른 장르로 옮겨지며 음탕한 인물로 묘사됐다. 조선 후기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1812~1884)가 서민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으로 개작했다. 그러나 성적 표현이 지나치게 비속한 내용으로 인식돼온 것이 사실이다. 옹녀는 특히 값싼 인물로 그려졌다. 자신과 결혼한 변강쇠가 장승을 패어 때다가 동티가 나서 죽고 난 뒤 아무 남자에게 장사만 치러 주면 같이 살겠다고 덤비다가 폭사한다.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의 국립창극단이 연극 연출가인 고선웅(46) 경기도립극단 예술단장과 손잡고 선보이는 신작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이를 비튼다. `변강쇠라는 색골의 이야기`로 통하는 `변강쇠전`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다. 무엇보다 변강쇠가 아닌 그의 여자로서 원작에 등장하는 옹녀에 시선을 돌린다. 이를 통해 변강쇠와 옹녀 사이에 `진실한 속사정`을 까발린다. 극본까지 맡은 고 연출은 19일 "`변강쇠전`이 외설적인 부분이 있기는 한데 나는 격조가 있어 보였다"고 말했다. "다시 보다 보니 옹녀가 생각보다 비중이 큰 주인공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런데 (원작이) 후반부에 가서 길을 잃더라고요. 이번에 잘하면 창극의 새 캐릭터가 완성될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어요."첫 창극 연출이다. "국립창극단 김성녀 예술감독님이 제안을 했을 때 심장이 뛰었어요"라면서 "창극을 해본적은 없지만, 영화 `서편제`를 보고 운 기억이 커요. 그때 감동을 재현할 수 있는 기회가 와 영광이죠."연극 `푸르른 날에`로 유명한 고 연출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리어왕`을 각색한 `칼로막베스`와 `리어외전` 등을 통해 기존의 작품 비틀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입증했다. 이 시대에 옹녀를 다시 이야기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지금은 타락한 시대죠. 때도 많이 타고. 순수를 강요하지만 이면에는 혼탁함이 있죠. 마인드도 순수하지 않고 본능을 교묘하게 숨기며 사는 시국입니다. 극중에서 성기를 묘사하는 행위, 성행위가 아닌 `기물(奇物)`을 표현하는 것인데 야한 것이 아니에요. 성적인 것을 삶의 밑천으로 승화시키는 거죠."고 연출은 옹녀는 착하고 열심히 사는 여자, 변강쇠는 날건달이지만, 가능한 캐릭터라고 판단했다. "그 안을 찬찬히 살펴보니 사랑이 숨어 있더라"는 것이다. "요즘 우리가 행하는 말초적인 것과 다른 휴머니티가 있어 훈훈한 느낌을 받았죠. 돈독함이 있어 잘만 표현하면 우리 시대의 좋은 사랑과 욕망의 거울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청가` `춘향가`를 보면 한자도 많고 어려운데 `변강쇠전`은 민중을 위한 작품이죠."원작과 달리 변강쇠와 옹녀가 2세를 두고 끝을 낸다. "그것이 좋은 의미죠. 이건 그냥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비극은 없어요."판소리의 특징을 살려 시각적으로 야하기보다는 청각적으로 야하게 만들고자 한다. "대단하더라고요.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 뮤지컬과 달라요. 소리를 접하면서 신기한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계속 소리의 길을 걸어온 분들인데 이미 그 안에 오락성이 다 있어요. 즉흥적으로 신명을 다 풀어내세요. (연습)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 모를 정도로 너무 재미있습니다."국악그룹 `푸리`의 멤버이자 안숙선(65) 명창의 제자이기도 한 한승석 교수(46·중앙대 국악)가 작창·작곡을 맡았다. 한 교수는 "보통 생각하는 변강쇠전을 뛰어넘어 역사와 여인의 아픔, 여성성을 구현하고자 했다"면서 "요소마다 해학적인 것이 많다"고 전했다. 판소리뿐 아니라 민요, 트로트 등 다채로운 소리를 작품 곳곳에 배치한다. "창극은 분명 판소리 어법지이지만, 판소리하고 달라요"라면서 "전통 성악의 여러 장르를 잘 버무러셔 풍성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라고 알렸다. 고 연출과 2박3일 합숙하기도 한 그는 "고 연출과 의논해서 템포를 빨리 만들었어요. 판소리 뿐 아니라, 온갖 가능한 것을 하자는 생각으로 민요, 정가, 가곡. 평시조도 넣었죠. 강하면서 풍성하게 만들어 극을 뒷받침하려 했습니다.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한 거죠"라고 설명했다.`변강쇠전`은 신재효가 사설로 정리한 판소리 여섯 바탕에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와 함께 들어 있었다. 19세기 후반까지 불린 것이다. 하지만 변강쇠와 옹녀가 서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바라보며 노래한 `기물가(己物歌)` 등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점차 외면받았다.1980년대 TV CF에서 `제비 몰러 나간다`는 `흥부가` 한 대목을 불러 더욱 유명해진 박동진(1916~2003) 명창이 1990년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무대에서 신재효의 사설에 소리를 붙여 완창한 바 있다. 이후 창극 `가루지기`(1979·연출 허규), 마당놀이 `변강쇠전`(2001·연출 손진책) 등이 공연됐고 만화가 고우영이 신문연재만화 `가루지기전`(1985)을 선보였다. 영화 `변강쇠`(1986·감독 엄종선) 및 `가루지기`(2008·신한솔) 등도 이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음란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정작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국립창극단은 이처럼 잊혀져가는 콘텐츠를 `판소리 일곱바탕 복원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선정, 되살리겠다는 계획이다. 무엇보다 국립창극단 역사상 처음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작품이다. 만 18세 이상만 볼 수 있다. 김성녀(64)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변강쇠`가 그간 너무 영화에서 성적인 묘사만 강하게 돼서 애들이 보면 안 되는 주제처럼 됐는데 여기에는 유랑민들의 아픔, 장승 문화 등 우리 전통 문화가 녹아 있다"면서 "성행위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묘사가 맛깔스럽다. 맛있는 변강쇠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만 18세 이상 관람가로 정했다"고 밝혔다. "일단 만 18세 이상 관람가부터 시작해서 만 16세로 내려도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있어요. 무엇보다 해학적이라 야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가족이 다 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들어요."26일간 23회 공연한다. 국립창극단 사상 가장 긴 기간, 가장 많은 공연이다. "그동안 관객이 많아졌어요. 기존 창극 관객뿐 아니라 연극과 뮤지컬 관객도 보러 오셨죠. 재미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도 뮤지컬처럼 장기 공연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들었습니다. 변강쇠전을 명예회복 시키면서 오래 공연할 수 있는 이정표를 세우고 싶어요."음녀가 아닌 열녀로 새롭게 태어난 옹녀 역에는 국립창극단 단원 김지숙(41)과 이소연(30)이 더블캐스팅됐다. 김지숙은 춘향, 심청, 숙영낭자 등 아리따운 여주인공을 도맡았다. 이번에는 연륜이 넘치는 농익은 매력을 지닌 옹녀를 연기한다는 각오다. 독일의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창극 `수궁가`에서 객원 신분으로 주인공 토끼를 맡았던 이소연은 `배비장전`의 애랑 `숙영낭자전`의 매월로 눈도장을 찍었다. 영화배우 조승우(34)의 데뷔작이자 김성녀 예술감독이 월매 역으로 출연했던 임권택(78) 감독의 영화 `춘향뎐`에서 방자 역을 연기한 김학용이 변강쇠를 맡았다. 지난해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신예 최호성이 변강쇠를 나눠 연기한다. 이소연은 "색이 많은 창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원작의) 드러나지 않은 격조가 잘 표현이 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음탕하기보다는 격조 있는 옹녀를 연기하고 싶다. 내면의 섹시미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창극 뿐 아니라 연극, 영화에서도 활약하는 김 예술감독은 "여러 장르의 배우 중 창극 배우들이 가장 열려 있다"면서 "연극배우들은 몰입을 위해 긴장을 많이 한다. 하지만 창극 배우들을 판소리를 해서 잘 풀려있다"고 짚었다. "한태숙 연극연출가님도 그렇고 저희와 함께한 분들은 배우들이 정말 열려 있다고 하더라고요. 즉석에서 시킨 것 다하고 알파까지 더한다고요. 연극배우들이 창극하는 사람들의 풀어져 있는 모습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해요."제목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변강쇠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옹녀의 시대를 연다`는 의미다. 6월11일부터 7월6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볼 수 있다. 예술감독 김성녀, 안무 박호빈, 무대디자인 김충신, 의상디자인 이승무, 영상디자인 이원호, 조명디자인 송영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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