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진 후보는 1961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전근이 잦으셨기 때문에 나와 남동생 둘, 그리니까 모두 셋을 할머니 댁에 맡기셨다.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신 할머니는 손자들의 교육에 엄격하셨지만 손자들에 대한 사랑 또한 남달랐다. 한 밤 중에 불덩이인 손자를 업고 병원에 가기 위해 불빛 하나 없는 삼십리 길을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할머니의 품이 그립기만 하다.중학교까지 안동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는 대구로 진학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다 큰 도시로 가서 공부를 해야 된다.’라고 하시면서 대구로 보내주셨는데 안동 촌놈에게는 대구유학 생활이라는 것이 낮설기만 했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 하숙생활과 자취생활, 경향 각지에서 대구로 유학 온 새로운 친구들과의 사귐, 중학교 시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학업경쟁, 안동에 비해 수십 배나 번화했던 도시의 낯선 풍경들 등. 이러한 환경 촌놈의 자존심을 지켜가기 위해서 친구들과 싸움도 했고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꿈을 하나씩 하나씩 키우기 시작했다.대학은 더 큰 뜻을 위해서 서울로 갔다.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진학을 했으나 영어보다는 사회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철학 등을 영어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정치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대학원 석·박사 학위를 받는 과정 중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국 최초로 대학원 총학생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이끌기도 했고 통일원 통일정책보좌관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현실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세계에 뛰어들기도 하였다.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정무보좌역과 공보보좌역으로 활동했지만 두 번째 도전 역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권영진의 정치’를 하겠다고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한 후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여태껏 단 한번도 ‘싫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적이 없었다. 통일원에 사표를 내고 선거에 뛰어들 때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이회창 총재의 대선 캠프에 뛰어들었을 때도 아내는 묵묵히 나의 선택을 따라 주었다. 이러한 아내의 반대를 설득하는 마지막 카드는 장인 장모님이었다. 그래서 결국 ‘권영진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었고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정치를 하더라도 평상시 가족을 정치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선거운동 기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돕겠다.’는 이 두 가지 아내의 요구조건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 있다.2004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탄핵의 역풍 속에서 2,000표(1.9%) 차이로 석패하고 말았다. 한나라당 노원(을) 위원장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당선에 일조하면서 약관43세에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2008년 18대 국회의원 당선이 되었다. 그래서 정치와 행정을 겸비하게 되었다.특히 서울시 부시장 재임 중 언론과 서울시 의회로부터 ‘역대 최고의 정무부시장’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장애인 인권과 복지에 주력해 ‘서울시 장애인부시장’이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국회의원 시절에는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학등록금 인하, 만5세 무상유아교육 실현 등에 앞장섰고, 사단법인 「교육과 나눔」의 운영이사로서 저소득계층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개천에서 용 만들기’의 가능성에 도전하고 하였다.정치 선진화 실현을 목표로 18대 국회 민본21 창립을 주도했다. 이후 줄곧 ‘국정과 당 쇄신, 당 화합’에 앞장서 왔으며, 몸싸움 없는 국회를 위한 ‘국회개혁 5대 법안’을 발의하기도 하였다. 2009년 황조근정훈장 수훈을 비롯하여 시민단체와 언론이 수여하는 각종 국회의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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