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숨결과 혼이 담긴 건물 고택(古宅),  평온을 바라는 나 자신을 찾기에 너무나 좋은 공간이 또한 고택이기도 하다 . 오래된 목재에서 풍기는 부드러움..그 속에 묻혀있는 과거.. 그런 나무기둥을 만지는 나는 그만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먼 옛날로 돌아가는듯 편한 마음이 찾아온다.어느 향토문인은 "고택체험이란 그 말만으로 그만 평온해지는 이유..그것은 내가 이미 그런 나무의 숨결속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표현했다.경북도는 고택-종택 등 기존 전통한옥을 활용, 선조들의 주거양식과 생활상을 몸소 체험하고 그 안에 내재된 조상들의 지혜와 한옥의 우수성을 직접 깨닫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한옥체험업(業)” 사업을 본격 시행키로 했다. “한옥체험업”은 지난해 10월 관광진흥법 시행령 개정과 함께 관광편의 시설업으로 새로이 지정된 전망이 아주 밝은 업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경북도는 현재까지 도내에 지정된 한옥체험업소는 안동시를 비롯  6개 시군 전체 51개소에 이르며 한옥체험업소는 우리 고유의 전통한옥에 수세식 화장실, 샤워장 등 관광객이 이용하기 편리한 일정한 시설을 갖추어 시군에 신청하면 누구나 한옥체험을 할 수 있게 꾸민다는 방안이다. 도는 2004년부터 77개소의 전통한옥을 64억원을 들여 개보수 하는 한편, 사업비 8억원을 들여 고택음악회, 전통혼례체험 등 전통문화체험프로그램 지원사업도 병행하면서 가족단위 또는 친목회 단위로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전통문화체험도 함께 할 수 있도록 했다. 도 관계자는 “한옥체험업은 우리의 전통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전통문화체험도 함께하고 가족간의 소중한 추억도 만들 수 있어 도시 관광객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한옥체험업 지정으로 한옥 체험관광 숙박객이 대폭 증가되는 호기가 될 것으로 기대 한다”고 말했다. 경북도의 전통한옥 체험숙박사업이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기 활성화 등 경북의 우수한 문화유산 알리기의 효과를 톡톡히 볼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외국인 전통한옥 체험의 경우 영주 선비문화수련원이 1위, 경주 사랑채가 2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관광객수 16만7526명… 2011년보다 24% 늘어일자리 창출 등 크게 기여, 이용객 만족도 점차 높아경북도의 전통한옥 체험숙박사업이 갈수록 체험자가 늘면서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기 활성화 등 경북의 우수한 문화유산 알리기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또 한국형 체험숙박의 토탈 체제 구축을 통한 브랜드화를 통해 문화체험숙박사업의 성공적 정착이 이뤄질 경우 주변 지역 연계 등 지방경제 활성화에도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이런 가운데 경북도의 지난해 전통한옥 체험숙박 관광객이 16만7526명으로 2011년 13만5258명 대비 24%, 2010년 11만2523명 대비 49%인 큰 폭으로 증가했다.지난해 경북도의 한옥숙박체험 실태는 시기적으로 7~9월에 6만명 으로 전체의 36%를 차지했으며 4∼6월에 4만4000명으로 26%, 10∼12월은 4만1000명으로 25%, 1∼3월에 13%인 2만2000명으로 봄철 방문객이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숙박체험객이 많이 다녀간 곳은 영주 선비문화수련원이 2만2000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경주 사랑채가 1만2000명, 영주 선비촌이 1만명의 관광객을 보였다.또 마을단위로는 안동 하회마을이 2만1000명, 경주 양동마을이 7500명, 고령 개실마을이 4900명 수준을 나타냈다.외국인 숙박체험 현황은 숙박객 10명중 1명으로 2011년 1만2000여명에서 2012년 1만8000여 명으로 50% 이상 급격하게 증가했으며, 지역별로는 경주시가 1만여명으로 56%를 점유한 가운데 안동시가 4900여명, 영주시가 2300여명의 체험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이중 외국인이 가장 많이 다녀간 곳은 경주 황남동 소재 사랑채로 지난해 숙박객 1만1700여명 가운데 55%인 6400여명이 외국인으로 확인됐다.이처럼 경북 전통한옥 체험숙박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로는 하회·양동마을의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꾸준한 한류열풍 속에 경북도가 도내 고택·종택 등 전통한옥을 관광자원화 하기위해 2004년부터 136억원의 예산으로 경주, 안동 등 18개 시·군 163개소에 화장실, 샤워장, 주방 등의 개·보수 사업과 2006년부터 21억원의 예산으로 12개 시·군 109개소에 관광객들에게 고택음악회, 전통혼례, 공예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관광 트랜드가 보는(seeing) 관광에서 체험(doing)관광으로 변화하면서 방문이 꾸준히 늘어난 것으로 풀이됐다. 경북도는 앞으로도 전통한옥 체험숙박지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 추진하겠다며 현재 19개 시·군 182개소의 한옥 숙박체험 업소를 확충,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활력을 더해 지역 내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경북관광의 도약을 도모하겠다는 방안이다. <경북도내 주요 전통한옥 숙박체험지 안내>[경주 수오재] 守吾齋는 천년고도 경주를 사랑하는 기행작가 이재호님의 삶이 향기를 머금고 머무는 곳 이다. 전국에서 해체하여 옮겨지은 고택으로 모든 방과 지붕, 벽에는 옛 전통대로 시멘트 하나 쓰지 않고 흙과 짚, 대나무, 황토, 소나무의 천년 재로만으로 지은 집으로 건강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한옥이다.걸으면 5분 거리에 큰 국도인데도 차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은 저 만큼에서 야트막한 산 언덕이 살짝 가려주어 그리움만 잉태하고 소리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한옥 5채로된 守吾齋는 사철 푸른 대나무가 둘러싸 맑은 바람을 보내고, 흰 눈이 내리고 차디찬 북풍이 휘몰아 치면 온몸으로 울어대는 솔바람과 대바람은 온갖 인간사 삶의 질곡을 토해내어 가슴을 찡하게 후벼판다. 툇마루에 앉으면 명활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려져있고, 멀리는 토함산이 아스라이 가고 있으며, 우측에는 동남산이 적당한 거리에서 길게 펼쳐져 누워있다.[안동 치암고택] 경북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조선 고종때에 언양현감, 홍문관 교리를 지낸 치암 이만현(1832-1911)의 고택이다. 그는 퇴계선생의 11대손이며 문과(文科)로 벼슬길에 나아가 삼사(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관료로 성심을 다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으나, 은퇴 후 만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이듬해 세상을 마쳤다. 이집은 당초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 지역으로 인해 1976년 이곳으로 이건했다. 건물규모는 본체 22칸 ㅁ자형 기와집으로 5간의 솟을대문과 바깥채가 있다. 집의 구조는 안채보다 사랑채가 더 높고, 사랑채의 좌우가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의 특이한 형태이며 사랑채에 감실(龕室)이 있고, 높다란 헌함(軒檻)마루가 특색이다[안동 후조당]조선 선조 때의 문신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이 지었다고 전하는 별당건물로.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종택은 별당·정침·사당·재사·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정침에 부속된 건물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一`자형에 오른쪽으로 2칸 마루와 방을 달아 `ㄱ`자형을 이룬 큰 규모의 별당이다. 정침 왼쪽 담장 안에 있으며, 정침으로 통하는 협문과 정문을 갖추었고 왼쪽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신문(神門)이 있다.‘후조당’이라는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대청의 천장에서 고서 및 문집류, 고려 말기의 호적, 조선시대의 호적·교지·토지문서·노비문서·각종 서간류 등 희귀한 전적류가 발견됐다[영주 괴헌고택]영주시 이산면 두월리에 있는 조선시대 고가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62호다. 1779년(정조 3년) 김영이 부친으로부터 살림집으로 물려받은 이후 8대에 걸쳐 대대손손 종가를 꾸려오고 있는 집이다. 고택은 약간 경사진 대지 위에 남서 방향으로 지어졌는데, 안채와 중랑채 사랑채에 수많은 창고들이 보존되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잔디 마당이 나오고 정면으로 보이는 본채가 위엄을 자랑하며 서있는데, 정면 6칸 측면 2칸에 겹집형이나 부엌과 안방 뒤쪽으로 2칸이 더 붙어 좌측으로 3겹집이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대청마루가 있고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안방이 있다. 마당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있어 고택의 중후함과 잘 어울려 방문자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사모기둥으로 처마를 받치고 있고 툇마루의 난간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어 만져보면 매끄러운 목조의 느낌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영천 귀애고택]귀애고택은 문헌공 조명직(曺命稷)[1733~1807]이 1767년(조선 영조 43) 이곳으로 이주해 온 뒤 귀애 조극승(曺克承)[1803~1877], 운파 조병수(曺秉秀)[1832~1903] 등 일산 삼대가 귀애정·사당·별묘·육각정 등 47칸을 건축했다. 화남면사무소에서 화산면 간 신화로를 타고 1.8㎞가량 가다 북쪽 구일마을로 난 귀호1길로 약 400m가량 들어가면 서쪽의 산 밑에 있다.귀애고택은 남서쪽의 얕은 야산에 의지, 북동향으로 큰채를 배치하고 그 앞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방앗간채, 대문간채를 전체적으로 튼 ㄷ자형으로 배열했다. 고택 북서쪽에는 사당, 귀애정 등이 있다. 귀애고택 중 건립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큰채 뿐이다. 큰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이며, 구조는 주상부에 장여 수장한 3량가 맞배기와집이다. 집 뒤편의 야산에 바짝 붙여 큰채를 북동향으로 앉혔다.  [상주 오작당]오작당은 경북도 민속자료 제32호로, 원래 현재의 양진당 자리에 1601년에 창건한 건물을 양진당을 짓기 위해 허물고 1661년에 현 위치로 이건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인 오작당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고 왼편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중문간채가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이며 대청 뒤로 방이 있다. 전체 평면은 ㄱ자형이다. 사랑채의 뒷방은 서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문 안에 남향의 안채가 있다. 보통보다 높은 기단과 다락으로 인하여 건물의 높이가 껑충 높아 보이는데, 정면에서 보면 마치 이층집처럼 보인다.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이다. 부엌과 건넌방 쪽에서 한 칸씩 돌출한 구조다. 안채의 대청은 여섯 칸, 부엌에 접속한 두 칸의 안방이 있는데, 집을 처음 지었을 때는 거기에도 마루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대청 다음이 건넌방인데, 평면이 겹집형이어서 건넌방은 남북으로 겹집형식의 아랫방 윗방이 되고, 아랫방 앞에 한 칸의 툇마루가 있다. [문경 지취헌]18세기 후기의 농촌 반가(班家)로 안채와 사랑채가 이자형(二字型)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 조선시대 후기의 상류주택 건축수법과 차별화된 가옥형태의 변천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현 거주자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후기 농촌 반가의 주생활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전통 한옥에서 그 치목수법이나 결구수법 등 독특한 건축적 특징은 찾아볼 수 없으나 전통건축의 주생활 변천사의 자료적 의미가 부각되는 건물이다. 지취헌은 이 집을 처음 건립한 류혜춘의 호이며 이를 활용하여 『문경 지취헌고택』으로 칭한다.[군위군 남천고택]경북도문화재자료 제357호로 지정, 160여 년 전에 지은 홍우태(洪禹泰)의 살림집으로, 그후 주손(胄孫)들로 이어지면서 수차례 중수했다. 사랑채 대청의 상량문으로 보아 1836년(헌종 2)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는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집성촌이며 남천고택은 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또한 상매댁이라고도 불렸으며 당시 의흥현(義興縣)에서 제일 오래된 가옥으로 알려졌다. 대율리의 마을형국은 전체적으로 배모양으로, 이 가옥은 마을 중심부에 있다. 산세에 따라 북향에 자리잡고 있으며 양지산(필봉)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 이 가옥의 형태는 ‘흥(興)’자형의 독특한 배치였으나, 광복 후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되고 대문채는 옮기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현재는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 사당이 있고 주위는 자연석으로 돌담을 쌓아서 둘렀다. [의성 초해고택]초해고택은 안동김씨와 서애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마을에 있다. 1896년 민비시해를 계기로 사촌마을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는데 그때 일제에 의해 마을이 전부 불타면서 지금의 초해고택은 100년전 새로이 지어진 근세식 한옥으로 100% 춘양목으로 지어졌다. 초해고택에서는 소담하고 정겨운 한옥의 정을 느낄 수 있으며, 고택을 운영하는 주인장은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어 의성관광에 대한 다양한 안내를 받을 수도 있다.[청송 송소고택]중요민속자료 제250호로 조선 영조 때 만석의 재산을 가졌던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심호택(沈琥澤)이 1880년경 파천면 지경리(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거하면서 건축한 가옥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을 달고 9대간 만석의 부를 지녔던 주택이다.10채의 건물이 경내에 있으며 그 중 측간(안채·사랑채)과 대문간채는 개화기 이후의 건물이다. 그 외의 건물에도 중수시 1912년 이래의 개화형 흔적이 보여 1880년대 건축구조가 온당하게 보존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기와를 이은 맞배지붕인데 대문 좌우로 행랑채가 있다. 대문간채와 이웃한 북방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마당채가 있다. 안채 앞마당에 화단이 있고 그 남쪽에 우물이 있다[영양 병암고택]두들마을의 문학관과 인접한 재령 이씨 가문의 고택으로, 문학의 향기에 취하고 싶다면 경상북도 영양군을 둘러보길 추천한다. 낙동강의 협곡지대에 있어 청정 자연 속을 거닐며, 다양한 문학관을 한꺼번에 둘러 볼 수 있다. 주실마을과 감천마을, 두들마을 순으로 가로지르며 청송 방향으로 내달리는 길은 남다른 발자취를 남기기에 제격인 코스다. 이중 두들마을 안에 130여 년 된 병암고택이 있다. 주실, 감천, 두들마을 순으로 떠나는 문학 기행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 자락의 읍이나 면으로 들어가면 작고 옹골진 마을들이 즐비하다. 대체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된 곳인데,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趙芝薰) 작가와 애국지사 오일도(吳一島) 시인, 현대문학의 거장 이문열(李文烈) 작가가 배출된 고장이다. 풍수 지리학적으로 붓 모양의 문필봉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마다 문인의 배출이 많다고 하며 신기하게도 이들의 출신지는 하나같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고 문필봉을 갖춘 산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조선의 실학자들이 대거 거주했던 주실마을은 근대 시대의 저항 시인, 조지훈 선생의 고향이다. 생가였던 호은종택이 보존되어 있으며 지훈길과 지훈시공원, 지훈문학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영덕 삼벽당]경북 문화재 자료 제458호인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위치한 삼벽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연공파 이중량(1504~1582)의 종택이다. 이중량은  농암 이현보(1467~1555)의 넷째 아들로 중종23년(1528)에 진사시에 합격, 중종29년(1534)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3년(1570)에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의 규모는 정면5칸,측면5칸반이며 중문간 좌측 사랑채에 정면2칸,측면2칸의 사랑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삼백당은 조선중기에 건립한 것으로 전하여 오고 있는데 주요 구조부의 치목수법이 정교하다. 특히, 대청 배면에 설치된 판문의 중간설주의 흔적은 옛치목 수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청도 선암서원]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모신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7)에 매전면 동산동 운수정에 두분의 위패를 모시고 향현사라 하다가, 선조 10년(1577)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 했다. 숙종 2년(1676)에 다시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지금의 건물들은 고종 15년(1878)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득월정·행랑채가 ㄷ자 형을 이루고 그 뒤쪽으로는 선암서당이 있다. 선암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그 양쪽으로는 방을 들였다. 대문채의 남쪽칸으로는 송은·우당·소요당·제우당 등 14의사의 문집목판이 보관되어 있다.[봉화 남호구택]1876년, 농산(聾山) 김난영이 건립, 그의 아들 남호(南湖) 김뢰식이 살던 집이다. 명망 높은 부호였던 김뢰식은 자신의 전재산을 저당 잡힌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내놓은 공으로 1977년 건국훈장을 받은 인물. 그래서일까. 담장 안에 들어선 건물의 면면은 다시 봐도 새로운 기분이 들게 한다. 응방산 줄기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집은,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접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면 사랑채가 7칸, 안채 폭이 6칸, 전체 26칸의 규모이다. ㅁ자형 집은 사랑채의 가운데에 중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집은 옆면에 동향의 중문이 있다. 나무의 고장인 춘양에 위치한 부잣집답게 부재의 크기가 호방하고 양질인 고급목재를 사용하여 100년이 넘은 고택인데도 불구하고 변형되거나 보수한 흔적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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