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무명작가가 프랑스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공쿠르상을 받는다. 그가 죽은 뒤 ‘에밀 아자르’는 20년 전 공쿠르상을 수상한 작가 로맹 가리(1914~1980)의 또 다른 이름임이 밝혀진다. 공쿠르상은 한 작가의 생에 단 한 번 주어지는 상으로 로맹 가리는 유일하게 공쿠르상을 2회 수상한 사람이 됐다.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가 익명으로 추리소설을 펴냈다. 독자와 평자들의 반응은 미미했다. 두 달 뒤 그 작가가 ‘해리포터’ 시리즈의 조앤 K 롤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설은 품절 사태를 일으켰다. “아무도 내가 썼는지 모를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한 곡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고 상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슬픈 소설이 되었다. 슬픔에 대해 썼다는 게 마음에 든다.”(소설가 L)문학의 최전방에서 맹활약 중인 젊은 작가들이 익명으로 소설을 썼다. 여느 소설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가의 얼굴 사진과 출신 학교, 등단 매체, 문학상 수상 이력 등이 없다. 대신 ‘익명소설 작가모임’이라는 큰 이름하에 M, V, H, W, S, R, A, Q, L, Z 등 작가 스스로가 선택한 영문 이니셜이 작가의 존재를 알린다.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토로들에서 이 기획은 시작되었습니다. 눈에 띄는 금줄들이 걷혀도 눈에 보이지 않는 금줄이 부비트랩처럼 남아 있다는 고백들이 있었습니다. … 이 기획을 통해 겨누고 싶은 것은 낡은 안전장치들입니다.”(‘익명소설’ 기획의 말)모두 10명의 작가가 본명을 지우고 익명을 택하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저 상상력을 뽐내는 줄만 알았던 소설가들이 문학적 실험을 만류하는 문단과 출판계의 분위기 속에서 몸을 비틀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들은 ‘정형화된 문장에 대한 강요’ ‘장르적 요소에 대한 거부’ ‘정치적 풍자를 걷어내라는 압박’ 등에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했다고 토로한다. 기획에 참여한 작가들도 서로를 모르는 덕에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써보고 싶었던 이야기, 도발적인 내용 때문에 묻어뒀던 이야기,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실릴 수 있었다. 세계 최대 문학상인 노벨문학상이 사실은 ‘뽑기’에 의한 것이라는 발칙한 설정의 ‘18인의 노인들’, 메타픽션 형식을 취한 소설로 마감을 앞둔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룬 ‘셋을 위한 플롯’, 자폐아와 원숭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사회와 문단에서 터부시 돼 온 기묘하고 충격적인 관계를 그리는 ‘거기 그렇게 그들은’ 등이다. 단행본 발간 후 1년 동안의 비밀 유지 기간을 뒀다. 이후부터 각자가 이름을 밝힐 수도 있고 그대로 둘 수도 있다. 한국판 ‘에밀 아자르’가 탄생할 수도 있고, 책이 불티나게 팔릴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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