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6일로 5개월이 되는 가운데 뉴욕의 중견 화가가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한 연작들을 잇따라 발표해 관심을 끌고 있다.화제의 주인공은 윤경렬(67) 작가. 그는 지난 7월1일 뉴욕 퀸즈뮤지엄에서 개막한 ‘시간의 그늘 : 재미한인작가 아카이브 2부 1989∼2001’ 전에서 세월호 작품을 처음 선보인 바 있다. 당시 전시회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뉴욕서 활동한 한국의 대표 작가 44인의 작품전으로 많은 갤러리들의 주목을 받았다.세월호 비극을 주제로 한 윤경렬 작가의 작품은 검은색 선체 바닥과 거친 파도의 추상적 이미지에 노란색 리본과 한글로 `엄마 사랑해`라고 표현해 미국인 관람객들도 한눈에 세월호 참사임을 알아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이후에도 세월호 시리즈를 계속 그려 지금까지 일곱 작품이 완성됐고 최근 뉴저지 해켄색의 고급몰 블루밍데일 백화점 내에 있는 리버사이드 갤러리에서 시범전시를 했다. 세 작품은 캔버스에 네 작품은 아크릴 글래스에 표현했다.윤경렬 화백은 15일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와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지난 4월16일의 대참사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어서 당시 작업하던 것을 물리치고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지난달까지 그렸다”고 밝혔다.세월호 작품은 끊어지고 단절되고 파괴되는 부서지는 마음의 아픔을 형상화한 것이다. 끊어진 선체와 어린 학생들이 마지막 순간 남긴 애달픈 문자메시지들이 가져오는 서정과 느낌의 중첩을 이미지화했다.세월호를 주제로 한 가장 큰 대작은 화면을 분할하듯 4개의 그림을 사각형 형태로 구현한 400호짜리 작품이다. 윤경렬 작가는 “제 작업은 처음부터 분명한 모티브를 갖고 가는 게 아니라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맞춰나가면서 완성되는 것”이라며 “첫 작품은 다른 주제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으나 세월호 참사로 모든 게 바뀌었다”고 말했다.그의 캔버스는 실존적인 흑백으로 간략하게 시작하다 지우고 덧칠하고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형상화된다. 4개를 이어 만든 작품은 지난 5월 말 완료됐고 아크릴 글래스 작품도 연이어 들어갔다.올들어 첫 시도한 아크릴 글래스는 덧씌우기 작업이 독특하게 표현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캔버스의 덧씌우기는 불가피하게 묻혀가지만 아크릴 글래스는 이전 터치가 살아 있으며 앞으로 진행될 과정이 투명하게 나타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아크릴을 두 개로 앞뒤로 덧씌워 공중에 부유하는듯한 3차원적인 공간감을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선체처럼 허물어져 나간 구상 자체에서 내재된 욕망의 절제와 단장을 끊는듯한 아픔과 그리움, 강박과 불안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여느 부모들처럼 그 역시 세월호 참사로 인한 충격은 대단했다. 300명이 넘는 희생자 숫자도 놀랍지만 평온한 바다에서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가라앉은 초유의 참사였기 때문이다.아내 윤승자(61) 리버사이드갤러리 관장은 지금도 세월호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짓는다. “우리가 딸만 다섯을 두었어요. 이제 다 장성했지만 미술을 위해 힘겨운 이민 생활을 하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덕분이었어요. 만약 아이들 중에 하나라도 잘못되는 일이 있다면 삶의 의미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마지막 남긴 목소리, 문자메시지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 얼굴이 오버랩됐다”는 윤경렬 작가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던 그 절실한 마음들이 세월이 지나며 인성과 의식, 영혼의 부재 상태로 본래의 방향성을 잃고 고갈되는 모습이 안타깝다”며 작금의 혼란스런 세월호 정국을 빗대었다.그는 ‘메타포(은유)의 작가’로 통한다. 지난해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전시회 ‘행복한 추상전’은 “글자없는 시와도 같은 작품들”이라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그는 “표현주의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인상파적인 요소도 있고 초현실주의 요소도 들어가고 내맘대로 그어보는 강렬한 선 속에 감정도 있지만 내재적인 힘도 작용한다. 내가 받는 직접적인 자극과 충격이 그림에서 하나의 압축된 시가 되야 한다는 그런 주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어린 시절부터 그는 학급 환경 정리 미술 작업을 도맡을만큼 재능을 보였다. 서라벌 고교와 서라벌 예대를 거쳐 기존의 국전제도에 반발하던 현대미술제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좀더 충격적인 변화를 줘야겠다는 각오를 세우고 1988년 스페인 유학을 결심했다.그러나 나이 마흔에 딸 넷(막내는 스페인에서 낳았다)과 아내를 데리고 낯선 땅 스페인행은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독일에서 전시한 인연으로 매년 소품 몇 개를 책임지고 판매하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게 없었으면 엄두를 못냈을거에요. 스페인은 물가도 싸고 다른 유럽 국가보다는 편안한 느낌이었지요.”국립대학인 5년제 마드리드 미술대에 등록한 그는 한국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3년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지방을 돌며 전시회를 통해 제법 팔리는 동양작가가 되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은 가난했지만 과거 영광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작가로서 커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회상했다.스페인에서는 작위적이지 않은 서양의 초현실주의와 모든 내재적인 밑바탕의, 동양적으로 말하자면 무위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작품이 주를 이뤘다. 과잉된 감정의 절제와 현실에 바탕을 둔 작가의 사적인 느낌들을 구상적으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상승 효과를 내는 작업들이었다.“옛날 국전엔 서예 작품과 미술 작품이 한꺼번에 전시되었는데 그때 갓 쓴 촌로들이 초서체 서예 작품을 보고 무릎을 치며 기가 막히다며 탄복하는 모습이 참 궁금했어요. 대체 뭘 갖고 저렇게 탄복할까. 그걸 유심히 지켜보다 어렴풋이 생동하는 기운, 그런 멋스러운게 느껴지더라구요. 동양의 예술엔 초월적 추상성이 이미 내재돼 있던거죠.”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8년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에 오게 된 것은 “이민자에게 보다 친화적인 미국에서 예술과 자녀 교육의 미래를 설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그로선 훨씬 힘겨운 곳이 미국이기도 했다.1995년 미국에 와서는 처음에 프레임 아트 비즈니스를 했다. 그림을 업으로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작품도 간간이 걸어놓고 한국서 연결된 작가들의 전시회도 도와주면서 지명도를 높였고 마침내 5년 전 리버사이드 갤러리를 오픈할 수 있었다.고급 쇼핑몰이라 임대료가 비싼 편이지만 백화점 측이 고객 관리 측면에서 문화예술 비즈니스에 대해선 어느 정도 혜택을 주고 있다고 귀띔한다.지난 8일엔 중국 상하이 미술관 소장 작품 전시회와 함께 한국과 중국, 미국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중국 작가들의 수채화를 소개하는 보기 드문 기회였다. 토론회에선 프랫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막내딸 윤희(23)씨가 일을 도왔단다.“딸들을 낳으면서 이름을 백희(흰색) 송희(푸른색)로 지었는데 계속 색으로 가기가 힘들어 셋째 넷째는 신희(샛별) 강희(편안)로 하고 막내는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이 그냥 희(빛남)로 했어요. 미국에 와서는 할머니(이초심 2009년 작고)가 계셔서 한국말과 예의범절을 익히는데도 큰 도움이 됐어요.”그는 “딸들이 아빠가 그림으로 고생하는 걸 너무 봐서 그런지 셋째와 다섯째만 미술을 전공했는데 둘 다 취업이 용이한 디자인을 택하더라”고 웃음지었다.세월호 연작은 일곱 작품으로 일단 끝을 맺었다. 조만간 세월호 작품들을 일반에게 공개할 계획을 갖고 있는 그는 “여태까지 살면서 부침이 많았는데, 앞으로는 작업에 집중하는 여건이 되면 좋겠다. 아티스트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며 의욕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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