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사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해 신선이 됐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려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됐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국사가 조성했다.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이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간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해방이후 쇄락해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이십여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전락했다. 하지만 10여년전부터 중창불사의 뜨거운 원력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낡은 건물들을 수리 및 단청해 지금은 위풍당당한 본산의 위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이 정도 규모 이상의 고찰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신라시대의 5층 석탑으로국보 제77호로 지정돼 있다. 전탑(塼塔)의 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단층인 기단부(基壇部)는 14개의 지대석을 바닥에 깐 뒤, 네 면에는 2개의 안기둥인 탱주와 귀기둥인 우주(隅柱) 모두를 각각 낱개의 돌로 구성했다. 탑신부(塔身部)는 초층 옥신(屋身)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초층 옥신석은 각 면마다 우주를 나타냈고, 남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을 설치했다. 우주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일종의 엔타시스(배흘림)형태이며, 기둥위에는 주두(柱頭)가 조각돼 있어 목조건축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2층 옥신석부터는 네 면마다 탱주를 뒀다. 옥개석(屋蓋石)은 그 형태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塼塔)처럼 낙수면과 받침에 층단을 나타냈는데, 낙수면의 층단은 모두 6단이며, 층급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는 5단이다. 추녀는 목조건물처럼 네 귀퉁이가 살짝 반전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이 탑은 옥개석의 상·하면에서 전탑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우주의 형태와 주두, 옥개석 추녀의 반전 등에서 목조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사촌마을고려 말 안동사람 감목공 김자첨이 이주하면서 마을을 처음 열었다는 사촌마을은 경북 의성의 대표적인 선비고을이다. 예로부터 삼정승이 날 명당 터로 이름이 높았다. 퇴계학문을 계승한 송은 김광수, 만취당 김사원, 천사 김종덕 등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다수 배출하였고, 류성룡도 이곳에서 났다는 탄생 비화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사가(私家)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만취당이 올해 국가지정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영귀정, 천연기념물인 사촌가로숲 등 볼거리가 많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전국적 의성을 일으겼던병신창의 당시 사촌마을은 의성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지이자 의병장 출생지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잿더미가 됐다.사촌마을의 서쪽에 있는 사촌가로숲은 길이가 1,000m가 넘어며 300년에서 600년 정도된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종의 수종이 풍수적으로 서쪽의 허함을 막아 인재가 배출 될 수 있도록 조성되어 현재 천년기념물(제405호)로 지정되어 있다.이 마을에 전하는 류성룡의 탄생 비화는 아주 재미있고 신기하다. 어머니 사촌 김씨 부인이 서애를 가졌을 때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 장차 크게 될 아이라고 생각하고 날을 기다렸다가 정승이 날 터라는 친정으로 옮겼다. 하지만 친정아버지는“집안의 기운을 출가외인에게 줄 수 없다.”며 딸을 내쳤다고 한다. 친정에서 쫓겨난 김씨 부인은 시댁으로 가던 도중 가로숲에서 서애를 낳았는데 그 때 사방의 나뭇잎이 모두 시들어 버렸다.◇산운마을빛바랜 기와 한 장, 기둥하나하나마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나는 고택과 정자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산운마을은 조선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 이광준이 영천으로부터 옮겨와 살면서 처음 마을을 이룬 이래 걸출한 문인과 학자를 다수 배출했다. 이들 중에는 광해군 때 승지를 지낸 경정 이민환, 현종때 형조판서 운곡 이희발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마을이다. 영천 이 씨 입향시조인 학동 이광준을 받들어 모신 학록정사(지방유형문화재 제242호)뿐만 아니라 국가중요민속문화재(제237호) 소우당, 운곡당(지방민속문화재제165호), 점우당(지방민속문화재 제166호) 등 고색창연한 고가옥들을 옛 모습 그대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전통의 마을이다.◇금성산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리다 경상북도 한복판에서 봉긋 빗어놓은 금성산은 소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가 무성한 숲 속에 신기한 전설이 깃든 영산이다. 그 옛날 시뻘건 용암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고 현재는 사화산으로, 곳곳에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들이 세월의 무게를 더해주는 곳이다.깎아지른 절벽인 듯 산세가 가파라 보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600평이 훨씬 넘는 평평한 모래밭이 펼쳐져있다.‘이곳에다 조상 묘를 쓰면 당대 만석꾼이 되지만 인근지역은 3년 동안 비 한방을 안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실제 파헤쳐놓은 커다란 웅덩이가 있어 단순히 지어낸 말이 아님을 말해준다.옛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시대에 만들었다는 길이2,730m, 높이4m 금성산성을 배경으로 등산로가 길게 나 있고 그 길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흔들바위, 조문전망암, 아들딸바위, 동굴 등을 만날 수 있다. 의상조사가 창건한 수정사과 산운마을을 함께 둘러보면 더욱 좋다.◇의성 조문국(召文國) 박물관 한반도에는 대륙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유이민(流移民)들에 의해 三韓의 여러 小國들이 만들어졌다.토착민에 의해 만들어진 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하나는 고조선 계통의 이주민, 또 하나는 부여와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으로 나눌 수 있다.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부터이다. 의성지역에는 청동기시대를 알리는 문화유적부 터가 발견(1987년 대구대 의성군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됐다.삼한시대 의성에는 읍락국가인 무동미지(武冬彌知)(의성군의 서부지역)와 조문국(召文國(의성군의 동부지역)이 있었다고 하며 召文國은 185년, 무동미지(武冬彌知)는 253년에 신라에 각각 병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삼국시대인 514년(신라 지증왕 15년)에는 아시촌 소경(阿尸村 小京)이 설치됐으며 757년(경덕왕16년)에는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이때 일계현(옥산)과 고구현(단촌)은 고창군(안동시)으로 편입됐고 비옥현(비안)과 안현현(안계)과 단밀현(단밀)은 문소군의 영현이 됐으며, 다인현(다인)은 상주로 예속됐다. 이곳 조문국의 역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이사금조’기록에 보면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 파진찬(波珍) 구도(仇道)를 좌군주로 일길찬(一吉) 구수혜(仇須兮)를 우군주로 해 두 장군에 의해 신라(사로국)에 병합됐다’는 내용이 짧게 기록돼 있다.박제된 과거만이 아닌 살아있는 현재와 톡톡 튀는 소재를 가지고 2013년 4월 25일 관람객을 맞고 있는 의성조문국박물관에는 본관 상설전시장, 별관 민속유물전시관이 있으며 인접한 조문국사적지 내 대리리 2호분의 유구를 재현한 고분전시관, 영천이씨 집성촌인 산운전통마을에 자연사를 소개하는 산운생태공원이 있다.금성산과 고총 고분이 즐비한 곳에 자리잡은 의성조문국박물관은 시간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나이테처럼 의성의 오랜 시간의 흔적들을 형상화한 건축물이다.본관 1층 어린이고고발굴체험관은 현재와 오랜 옛날 생활상을 비교해 보고, 국내 최초로 실내에서 고분 발굴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고고학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인간 중심, 의성, 조문국 역사의 빛을 뿜어내다”라는 주제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의성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하고 있는 2층 상설전시실의 전시구성은 역사의 빛, 의성인의 유래, 환경 변화에 따른 의성인의 생활사, 삼한시대 의성을 지배했던 조문국, 의성인의 찬란한 문화 유산 등으로 이뤄졌다. 의성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유사돌무지덧널무덤과 의성만의 독특한 특징이 나타나는 의성양식 토기,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에서 출토된 관식(冠飾)과 매우 유사한 금동관 등 1,000여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기존의 학술적인 문구의 딱딱한 박물관이 아니라 다양한 모형과 영상, 쉬운 설명들로 이루어져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배려가 돋보인다.◇금성산 고분군 한반도에는 대륙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유이민(流移民)들에 의하여 三韓의 여러 小國들이 만들어졌다.토착민에 의해 만들어진 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하나는 고조선 계통의 이주민, 또 하나는 부여와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으로 나눌 수 있다.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이다. 의성지역에는 청동기 시대를 알리는 문화유적부터가 발견(1987년 대구대 의성군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됐다.삼한시대 의성에는 읍락국가인 武冬彌知(의성군의 서부지역)와 召文國(의성군의 동부지역)이 있었다고 하며 召文國은 185년, 武冬彌知는 253년에 신라에 각각 병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삼국시대인 514년(신라 지증왕 15년)에는 아시촌 소경(阿尸村 小京)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16년)에는 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이때 일계현(옥산)과 고구현(단촌)은 고창군(안동시)으로 편입되었고 비옥현(비안)과 안현현(안계)과 단밀현(단밀)은 문소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다인현(다인)은 상주로 예속되었다. 이곳 조문국의 역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이사금조’기록에 보면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 파진찬(波珍) 구도(仇道)를 좌군주로 일길찬(一吉) 구수혜(仇須兮)를 우군주로 하여 두 장군에 의해 신라(사로국)에 병합되었다’는 내용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야사로는 김대문의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기신 남당 박창화 선생의‘남당유고 신라사초’에 보면 기원전 124년에 조문국이 형성되어 기원후 245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내용이 있음에 삼국사기 내용과는 약 60년의 기간의 차가 생긴다고 볼 수 있으나, 가히 조문국 부족국가의 모습은 강성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산재해 있는 고분들의 모습만 보아도 틀림이 없다. 고분 일대의 주변 경관으로는 백장골과 오동산, 알산은 조문국과의 일화들이 전해 내려오며 탑리고분군, 대리고분군, 학미고분군에 약 206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산재해 있으며 1960년대 발굴한 탑리 고분에서 금동관, 금동제관식, 목걸이, 장신구, 환구대, 마구류를 포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고 묘제(墓制)도 경주지역의 고유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유사돌무지덧널무덤”(類似積石木槨墓)을 사용하고 있다.특히, 조문국 금동관의 특징은 신라나 백제의 出자모양이나 山자모양이 아닌 독특한 고구려 북방식 모자(조우관) 모양인 꽈베기 모양의 작은 깃털모양의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의성 특유의 생활양식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효종 때 남인의 영수이신 미수 허목 선생의 문집인 기언별집 제1권에 조문국의 시가 남아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過召文有感 眉許穆(1595-1682)千載召文國 亡墟足悲凉繁華不復睹 荒草野花香壘壘見古墳 濯濯無白楊田父耕?上 猶說敬德王天地一何悠 終古幾興亡物理本無常 人情從自傷 感起前古恨 獨立槪嘆長          천년 조문국은 그 언제던가허무한 폐허만이 싸늘하게 남았구나번창하던 옛 모습 다시 볼 길 없고들판엔 풀과 꽃만 향기롭게 피어있네수북수북 고분은 많이도 솟아 있고허허한 벌판엔 벌목도 없었더라밭을 가는 저 늙은이 두던 위에서경덕왕 옛 얘기 전설 삼아 말하더라하늘과 땅 어찌하여 이다지 아득할까예로부터 흥망성쇠 몇 번이나 지났던고만물의 이치는 원래 무상한데부질없는 정회에 가슴만 쓰리구나그 옛날의 한스러움 저절로 일어나홀로 서서 생각함에 탄식만 길었더라위의 전설과 같이 영조때 편찬된 ‘여지도서(1760년)’를 보면 영조 원년(1725년)에 현령 이우신이 묘를 증축하고 하마비와 능지기를 배치해 왕릉을 관리했다는 것으로 보아 국가에서 경덕왕릉에 대한 제사를 지방수령이 지냄으로 지방민을 통제, 지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가뭄에 현령이 직접 제문을 지어 기우제를 지낸 기록으로 보아 지방행정 관리에 의해 기우제를 지낸 왕릉은 왕의 중앙 집권화의 과정으로 명산대천의 기우제장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국가사적으로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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