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중구는 근대골목 투어를 진행해왔다. 제1코스인 경상감영달성길에서 달구벌의 기원과 조선시대 행정중심 도시로서의 면모와 근대산업 발전의 근간 등 흘러간 시대의 변천사를 한 눈에 엿볼 수 있다.동산-박태준과 청라언덕 스토리, 동산-선교사 주택 스토리, 동산-동산의료원과 존슨 스토리, 계산성당, 제일교회 담장 옆 90계단, 대구 계산동 천주교회, ‘천재화가’ 이인성 등에 관한 얘기를 들어본다.  ▣ 아흔 칸, 애틋하고 슬픈 이야기 박태준의 ‘동무생각’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가곡이다. 국민가곡인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대구 중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이다. 청라는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 자를 써서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으로, 당시 박태준이 다니던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그리고 언덕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주택들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휘감겨 있는 모습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대구의 몽마르트로 불리기도 한다. ‘박태준과 청라언덕 스토리’는 가곡 동무생각의 모티브가 된 청라언덕의 러브스토리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를 위해 현재 청라언덕에 있는 90계단을 극적 요소로 활용했다. ▣ 대구 선교 역사의 산 증인 대구의 동산(東山)은 위치상으로는 서산(西山)이다. 왜 서쪽 산을 동산이라 부른 걸까. 중구 포정동에 경상감영이 들어서기 전, 대구읍지를 보면 그 답이 있다. 당시 달성 토성을 중심으로 서산은 동쪽에 있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산으로 불렸다. 동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 벽돌의 선교사 주택이다. 스위츠(Switzer), 블레어(Blair), 챔니스(Chamness) 주택이 그것이다. 이 세 주택은 대구에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선교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선교사주택은 1906년에서 191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선교사들의 이름을 붙인 주택이다. 현재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기초 돌로 사용된 돌은 허물어진 대구읍성에서 가져온 것이다.  동산의 선교사 주택은 건축사 측면에서도 중요한 유산으로 손꼽힌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주거양식과 당시 생활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절대 이곳을 가벼이 지나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 선조들의 건축양식을 대구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경외감마저 듭니다” 이곳을 찾은 미국인들은 고대 이집트 유물을 발견한 마냥 입을 다물지 못한다. ▣ 한류의 중심인 선교사 주택 대구 선교의 산증인인 선교사 주택도 한류 바람을 타고 있다. 일본, 중국, 대만을 비롯해 동남아 국가에서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여기엔 영화와 드라마의 힘이 크다.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촬영명소로 떠오르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람둥이와 여성독립운동가 사이의 연애기를 다룬 영화 ‘모던보이’를 비롯해 드라마 ‘한반도’와 ‘각시탈’이 선교사 주택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특히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드라마 ‘사랑비’다. 한류의 중심에 서 있는 장근석·윤아 주연의 이 드라마는 챔니스 주택 2층을 촬영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 1919년 3월8일, 그 길은 거사를 위한 비밀통로였다 계산성당 앞 큰길을 건너 제일교회 담장 옆으로 90계단과 함께 오르막길이 나온다. 1919년 3월 8일 일본의 감시를 피해 서문시장으로 통했던 지름길이다. 지금은 ‘3·1운동길’로 부른다. 이 언덕길 주변에는 당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울창한 솔숲은 ‘거사’ 장소인 서문시장까지 가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가려주는 비밀통로 역할을 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대구 3·1운동에는 유난히 많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특징이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그리고 대구성경까지. ‘학생의거’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동산의료원 뒤편 신명여중·고교에는 신명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신명3·1기념탑’이 자리 잡고 있다. 기념탑은 1972년 10월에 세워졌다. ▣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6·25전쟁이 한창인 1950년 12월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신식혼례로 치렀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통혼례가 일반적이었지만 매사 격식보다 효율을 따지던 박정희는 전란 중에 빠른 결혼식을 택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박정희 전문가들은 ‘박정희 다운 방식’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결혼식에는 허억 대구시장, 대구사범학교의 스승인 김영기, 육영수와 만남의 자리를 주선한 육본 정보과 송재천 소위(육영수의 외사촌) 등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이날 허억 시장이 신랑신부를 ‘박정희양과 육영수군’으로 잘못 소개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 그는 왜 계산성당 감나무에 집착했나 이인성(1912∼1950)은 ‘화단의 귀재’였다. ‘천재화가’라는 수식어는 늘 그의 이름 뒤에 붙어 다녔다. 20세기 전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양화가 중 으뜸이었다. 그는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살의 어린 나이로 당당히 입선했다. 이를 시작으로 6회 연속 특선을 차지하며, 화단에 그의 이름 석 자를 화려하게 알렸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계산성당에는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있다. 수령이 100년을 훌쩍 넘긴 듯한 모습이다. 이 계산성당의 감나무는 ‘이인성 나무’라 부른다. 이인성의 대표작인 ‘계산동성당’에 등장하면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이인성과 김옥순의 러브스토리를 간직한 나무이기도 있다.  ‘계산동 성당’은 대구의 계산동 성당의 정경을 불투명 수채물감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우리나라 근대 수채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작품은 일본적 아카데미즘이 맹목적으로 이식되고 있었던 시기에, 작가만의 독자적인 감성으로 서양화의 토착화 방법을 보여준 의미 있는 작품으로 중요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인성의 흔적은 중구 포정동 옛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 건물을 리모델링한 대구근대역사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인 이 건물은 1932년 일제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세운 것으로 이인성을 비롯한 대구 근대인물과 역사자료들을 전시해두고 있다.  대구시도 이인성을 아낀다. 수창초등학교 출신으로 지역 화단을 살찌운 그를 대구의 아이콘으로 예우한다.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고, 두류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계산성당 뒤편 계산예가는 도심골목투어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을 통해 대구 근대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자료제공: 중구청, 한국스토리텔링 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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