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동 입석입석은 큰 돌을 세워 놓은 것으로 선돌이라고도 하며, 고인돌이 있는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진천동에서 선돌을 세운 주위로 석축을 네모난 형태로 둘러 쌓아 놓았고, 선돌 앞에서 제사의식을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선돌 주위에는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있다. 주변지역은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유적 보존을 위해 선돌 지역을 발굴조사해 정비했다. 고인돌과 선돌의 관계 및 서로의 기능적 성격을 통해 고대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신당동 석장승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보통 몸체에 그 역할을 나타내는 글을 새겨 그것에 따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장승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으며, 마을사람들에 의해 ‘장승비’라 불리우고 있다. 장승은 네모난 돌기둥을 다듬어 한 면에 얼굴을 새겨 두었다. 기둥 정상에는 모자 모양을 새기고, 얼굴에는 눈썹·눈 ·코·입을 새겨 놓았는데, 입은 약간 웃는 듯한 모습이며, 코는 약간 떨어져 나갔다. 손에는 여의주봉을 들고 있어 일반적인 장승과는 다른 모습이다. 기둥 정상의 모자 조각으로 보아 문관의 형상으로 보이나, 얼굴 각 부분의 표현이 소박하고 자비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고 있어 미륵형 장승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승은 가슴에 새기는 기록과 생김새,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데 이 장승의 경우, 코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여의주봉을 들고 있는 외형상의 특징으로 보아 장승의 눈이나 코를 달여 먹으면 임신이 된다는 속설에 따라 아이 낳기를 원하는 여자들이 복을 빌던 대상이 되었거나,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마을 전체를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더불어 장승이 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고, 이 마을의 터가 예전에는 절의 입구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보호와 함께 사찰 경내의 경건함을 지키는 수호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돌장승이 많이 존재하지 않는 대구 지역에서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장승신앙의 한 형태로 남아 있다. ○월성동 좀돌날월성동 유적에서 발굴된 좀돌날. 후기 구석기 유물을 대표하는 좀돌날은 날카로운 단면을 가진 돌조각들로 요즘 커터칼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나무 가죽을 벗길 때, 짐승 가죽과 살을 분리할 때, 물고기를 손질할 때, 옷감을 재단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후기 구석기 유물관 메인 박스에 전시될 정도로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칠성동 고인돌신천유역의 고인돌 중 대표적인 것은 칠성동 고인돌이다. 북구 칠성동 대구역 4번 출구 앞 광장에 위치해있는 이 고인돌은 제3호고인돌을 중심으로 6기가 방사상(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우산살 모양으로 뻗은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다. 마을에선 이 고인돌들을 칠성바위라고 부르며 토속적 신앙의 대상이 돼왔는데, 칠성동이라는 마을 명칭도 여기에서 기원됐다.   칠성바위는 고인돌 중의 하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기 못 낳는 사람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낳는다면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영험은 조선 정조 연간 경상감사 이태영과 관련된 일화 때문이다. 이태영(李泰永)이 꿈속에서 북두칠성이 고인돌 자리에 떨어진 것을 보고 고인돌 덮개돌 위에 각기 일곱 아들의 이름을 새겨놓아 후손의 번영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들 고인돌에서는 부장품이 전혀 없었고, 지하에서도 널(시체를 넣는 관이나 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보아 애초부터 무덤으로서의 성격보다는 거석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성바위는 전국 곳곳에 분포해있는 것이며, 여기만의 특징이라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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