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서상돈 고택/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 뽕나무 골목, 제일교회흘러간 시대의 변천사 한 눈에‘중구 근대골목 투어’대구 중구 근대골목투어 2코스를 소개한다. 민족저항 시인 이상화 고택을 찾아 나라를 잃은 망국의 한이 뜨거운 불덩이가 돼 그의 식도를 거칠게 할퀴었던 사연을 들어본다. 또 대구 제일의 갑부로 국채보상운동의 신호탄을 쏜 서상돈의 정신을 배워보자. 그리고 명나라 최고 풍수지리가 두사충과 얽힌 뽕나무 골목에선 뽕나무를 심은 사연과 그의 사랑에도 귀 기울여 본다. 물론 현존하는 건물 중 적벽돌조 고딕건축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제일교회도 발걸음을 옮겨봄직하다.  ▣ 이상화·서상돈 고택/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 대구시 중구 근대골목투어 2코스 넷째 구간은 이상화·서상돈 고택이다. 저항시인 이상화와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이 생전에 머물렀던 집이다. 두 고택은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다.  고택 옆에는 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가 있다. 2012년 4월에 개관한 이곳은 대구도심의 근대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며 골목투어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계산예가는 영상실과 한옥전시실, 휴식공간을 갖추고 있다. 영상실에선 이상화·서상돈 고택, 3·1만세운동길, 청라언덕, 계산성당, 대구약령시 등을 소개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한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 근대 음악의 기틀을 다진 박태준, 현제명, 권태호, 근대미술가로 유명한 서동진, 이인성, 이쾌대 등 대구와 관련된 문화예술인의 삶도 엿볼 수 있다. ◆ 이상화-왜놈들이 판치는 세상, 詩로 저항하다 “시인이란 사상의 비판자이며, 생활의 선구자이기에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이상화에게 저항의 도구는 시였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상화는 가슴이 답답했다. 나라를 잃은 망국의 한, 그것은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식도를 거칠게 할퀴었다. 차라리 만주에서 일제와 맞서는 그의 형 이상정이 부러웠다. 그럴수록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조급함만이 밀려들었다. 가혹한 일제의 탄압은 항상 그에게 족쇄였고 갑갑함을 털어 내기 위해 가끔씩 수성들을 찾았다. 거칠 것 없이 넓게 펼쳐진 들판. 그는 참담한 심정을 노래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중략)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접혔나 보다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개벽’에 실린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그렇게 태어났다. 지금은 들안길로 불리는 수성들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배경이다. 그의 시비(詩碑)가 수성못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화는 어린 나이에 항일 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구고보에 다니던 1918년,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한다.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시였다. 이듬해 1919년 3월 8일에는 이만집, 김태련 등과 함께 ‘대구 3·1 운동’을 주도했다. 연락책을 맡아 계성중학교 학생들과 연합시위를 벌이는 한편, 서문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독립선언문을 돌렸다.  살아생전 이상화는 네 개의 호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뜻을 가진 ‘무량(無量)’이라는 불교 용어를 썼고, 두 번째는 ‘항상 불같이’라는 뜻의 ‘상화(尙火)’라는 호를 썼다. 세 번째 호는 이름과 발음이 같은 ‘상화(想華)’, 마지막 호는 ‘백아(白啞)’였다. 말 그대로 ‘백치와 벙어리’처럼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이상화 고택 민족시인 이상화가 말년에 머물렀던 이상화 고택은 대구 중구 계산동 2가에 있다. 서상돈 고택과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마당과 장독대로 이루어진 목조주택으로 그가 울적할 때마다 마음을 달래주었던 감나무 마당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상화 고택은 2008년 8월 12일,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이 시작됐으니, 거의 10년 만에 이룬 일이었다.  2001년 상화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시민의 관심이 높아져 고택 보존 운동에 더욱 불이 붙었다. 시민 40만 명이 고택 보존을 위한 서명 운동에 동참했고, 성금 8,600만 원이 조성됐다. 결국 군인공제회에서 인근에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2005년 10월 대구시에 기부체납해 고택 보존의 길이 열렸다. ◆ 서상돈-대구 제일의 갑부, 국채보상운동 신호탄을 쏘다 국채보상운동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서상돈(1851~1913)을 첫손에 꼽는다. 그는 1866년 천주교 신자 박해 사건인 병인사옥 당시, 대구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이후 1871년부터 대구에서 지물행상과 포목상을 시작해, 1886년에는 이미 상당한 재벌로 성장했다.  1903년에는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된다. 시찰관은 정부의 검세관으로 세금을 미리 대납하고 나중에 세금을 거둬 대납금을 전부 충당하는 일종의 세금징수 청부업이었다. 세금을 대납해야 하기 때문에 시찰관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어야 될 수 있다. 특히 시찰관은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자리였다. 이 때문에 시찰관 자리를 꿰차기 위해 줄을 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서상돈은 다른 시찰관과는 달랐다. 세금을 거두어 대납한 금액을 초과하는 부분도 나라에 바쳤다.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나라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삶은 독립협회가 주관한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에게 반강제적인 차관을 제공했다. 일제가 차관을 제공한 속내는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차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07년에 이르러 1,300만환에 달했다. 한 나라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그들에게 예속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씩 그들의 야욕을 채워나갔다.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거금을 빚진 대한제국은 이를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 때 울분을 참지 못한 백성들 사이에서 주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 부사장으로 있던 서상돈은 담배를 끊어 국채 1,300만환을 갚자는 제의를 한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나라 빚을 갚기 위해 백성들이 스스로 시작한 ‘경제적 자발 구국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 중심에 서상돈이 있었다.“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환은 우리나라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가 못 갚는다면 그 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인민들은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상돈이 동지들과 함께 쓴 ‘국채 1,300만환 보상 취지’의 내용)◆ 서상돈 고택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있는 서상돈 고택은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과 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다. 도심 속 골목 한 모퉁이에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지듯, 고택은 화려함 뒤에 고고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고택만 보고서는 서상돈 선생이 대구 제일의 갑부였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는다. 만석꾼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소박한 집이다. 그래서 고택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의외라는 반응들을 보인다. 서상돈의 청빈한 삶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뽕나무 골목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 두사충 스토리 대구시 중구 근대골목투어 2코스 다섯째 구간은 뽕나무골목이다. 뽕나무골목은 조선에 출병했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지금의 앞밖걸과 계산성당 사이로 난 골목이 그곳이다.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던 두사충은 지세를 살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도록 결정하는 전략 참모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출병했다. 하지만 두 번째 출병 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터를 잡았다. 경상감영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지금의 계산동 뽕나무 골목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뽕나무를 심고 길쌈을 하며 살았는데 그 연유로 뽕나무골목이라 불리고 있다. ◆ 뽕나무 골목-‘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던 두사충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부관으로 출병해 처음 조선과 인연을 맺었다. 정유재란 때 다시 출병,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장차 명나라가 운명을 다할 것을 예감하고 조선에 귀화했다. "신하된 자로 오랑캐를 왕으로 모실 수 없다"는 그의 충절 때문이었다. 그 후 두 아들과 대구에 정착, 평생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 후손이기도 한 그는 조선 최고의 인물인 송강 정철, 서애 류성룡, 백사 이항복, 우복 정경세, 약포 정탁, 충무공 이순신 등과 교류했다. 또한 풍수와 관련된 전설 같은 일화는 아직까지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가 `소점한 터`는 풍수지리가들의 꾸준한 연구대상으로 남아있다. 두사충은 지금의 대구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에 정착했다.◆ 뽕나무골목 일화 대구부로 내려온 두사충은 두 아들 산(山)과 일건(逸建)을 조용히 불렀다. "우리가 살게 될 이 터는 내가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곳이다. 이곳의 정기는 비슬산에서 시작하는데, 그 맥이 최정산(지금의 대덕산)-삼봉산(수도산)-연구산(자라바위)-아미산(남산동) 일대로 와서 멈추고 있다. 그리고 그 맥이 마지막에 멈춘 곳에서 천 걸음을 걸어 닿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니 이 터는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자리다. 이곳이 천하의 명당인 셈이다" 선조에게 대구부에 정착하겠다고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조선의 산세와 지세를 훤히 꿰뚫고 있던 두사충이기에 이곳이 길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601년(선조 34), 두사충이 살던 거처가 경상도를 관할하는 경상감영 부지로 결정됐다. 두사충은 지금의 선화당(경상감영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곳)이 있던 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칭해 1965년 경북도청을 산격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영남지역의 중심지였다. 두사충의 예언대로 "하루 천냥이 나는" 길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그 터를 보전하기 위해 경상감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뽕나무를 심다 계산동으로 거처를 옮긴 두사충은 고민에 빠졌다. 대토 받은 4천여 평의 땅은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두사충은 조선에서 가장 큰 걱정 중 하나가 바로 의복문제로 보았다. 제대로 된 옷이 없어 겨울이면 백성들이 추위에 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임금께 대토 받은 4천여 평의 땅에 뽕나무를 심었다. 훗날 계산동 일대가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게 된 연유가 이 때문이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된다.  그 후 두사충은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최정산(지금의 대덕산)으로 집을 옮긴다. 연재(蓮齋)라는 아호도 모명(慕明, 명을 그리워 함)으로 바꿨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대명처사(大明處士)라 불렀다. 그때부터 최정산 일대의 마을은 "명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대명동(大明洞)이라 불리고 있다.  현재 대명 11동까지 있는 대명동은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洞)이 되었다. 이 역시 두사충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사충은 한평생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하다 결국 대구에서 생을 마감한다. ▣ 제일교회 2코스 여섯째 구간에 옛 제일교회가 있다. 대구 제일교회는 건물 전체에 근대 고딕양식이 잘 나타나 건축물 연구에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새로운 예배당이 동산동에 건립됨에 따라 지금은 남성로 선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교회를 창립한 베어드 목사를 비롯해 종각 건립에 힘쓴 이주열 권사 첫 세례 교인인 서자명 스토리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제일교회-나는 교회라…그들에게 복 있어라 제일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대구에 첫 복음의 씨앗이 싹튼 곳은 한약재상들이 모여 있는 남성로 약령시장 골목이었다. 1893년 4월 22일 부산에 있던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목사가 약령시장 골목에서 전도지를 나눠준 것이 대구제일교회의 출발점이다. 제일교회 창립일이 4월 22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곳은 현존하는 건물 중 적벽돌조 고딕건축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아 대구시 유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됐다. 건물 하부 기단부에 사용된 석재 중 일부는 대구읍성(1907년 철거)에 사용됐던 석재이다. 이 예배당은 현재 약령시장 입구인 남성로 50번지에 있어 대구제일교회 선교관으로 불리고 있다. 이 예배당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현재의 대구제일교회는 5만여 평의 아름다운 동산에 우뚝 서 있다. (자료제공: 중구청, 한국스토리텔링 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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