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서원은 선비를 길러내고 선현을 제사하는 곳으로 조선 일대를 통해 선비들의 학문공간이었다. 중국의 서원이 학문을 전수하는 강학기능이 중심이 됐다면, 한국은 자신을 수양해 덕성을 함양한다는 측면이 중시됐다.  한국에서 서원의 효시는 주세붕이 설립한 소수서원이지만, 조선의 서원이 한국적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퇴계 이황이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공간으로 서원을 제시하면서부터였다.  4대 사화로 극도로 위축된 사림들은 이후 그들의 이상을 논하는 새로운 논의의 공간으로 서원을 만들어 나갔다.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은 사림들의 이상향으로 끊임없이 방문자들이 찾아왔으며, 조선의 선비들은 도산서원을 모델로 여러 서원들을 운영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도산서원의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을 4년간 하면서 도산서원에서 이뤄진 출판, 선비들의 교유, 지역사회에서의 위상 등을 탐색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사적 관점에서 도산서원을 조명하고, 방문자들의 시와 글에 묘사된 도산서원의 참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사림의 교유와 도산서원의 위상’을 주제로 한 공개포럼을 10일 오후 2시 국학진흥원 국학문화회관에서 개최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고 월천 조목을 배향한 곳으로 조선후기 선비들의 이상적 공간이었다.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도산서원을 찾아와 상덕사에 모신 이황의 위패를 배알하고 다양한 기록을 남겼으며, 안동부사나 예안현감으로 임명된 관리들도 도산서원을 방문했다.  구완회 세명대 교수는 도산서원과 지방관의 관계에 대해 발표한다.  안동과 예안은 특이하게도 수령들의 선정비가 없는 지역이다. 안동에 선정비가 없는 이유는 퇴계의 가르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선비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에서 수령에게 드러내 놓고 아첨하는 행위인 선정비를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 안동지역의 정서였다고 본다.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위원은 도산서원 방문자들의 시를 분석해 발표한다. 방문 목적과 시기를 분류하고, 퇴계를 추모하면서 지은 후학들의 시를 소개한다.  정우락 경북대 교수는 기행문을 분석해 발표한다. 도산서원 방문자들의 기억에 초점을 맞춰 조선시기 도산서원의 방문자들이 도산서원에서 느낀 감흥을 전한다.  김득연은 “얼마간 걸어서 도산서원에 도착했는데 사당에 참배하고 완락재, 암서헌, 지숙료, 관락헌 등을 보니 완연히 뵙는 등 흠양의 마음이 우러나고 나아가서는 옆에서 부축해 모시고 있어 직접 말씀을 듣는 듯했다. 가만히 도산서당을 살펴보니 창문과 책상이 명랑해 진실로 진유의 서식처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남이 뒤여서 모시고 배울 수가 없었으니, 평생의 한이 아닐 수가 없다”고 썼다.  지금은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안동 방면에서 들어가는 길 밖에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의인리에서 도산서원으로 들어오는 다리가 있었던 사실도 밝혀냈다.  도산서원은 17세기 초반까지 도산서원과 유림 자체가 뚜렷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18세기 중반 이후 도산서원의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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