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영공원의 재(再)발견.-동네공원· 역사적가치가 있는 공원`경상감영공원’터는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監營)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도청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 이다. 조선은 전국을 8도(道) 체제로 일원화하고, 각 도마다 관찰사를 파견했다. 관찰사는 감사(監司)라고도 불리며, 해당 관할지의 행정 및 사법권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도 겸직함으로써 해당 지역의 군사 지휘권까지 가졌다. 도내 모든 수령(목민관)과 진관(鎭官)의 장수들은 관찰사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관찰사는 중앙에서 별도로 임명해서 파견하기도 했지만, 예산 절감 등의 이유로 관할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의 수령이 겸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에, 관찰사를 겸한 수령의 관저가 곧 감영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유래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의 이름을 만들었다. △감영공원의 재(再)조명. -‘선화당(宣化堂)징청각(澄淸閣)’감영이 설치된 이후 관청 건물인 선화당, 관찰사 집무소인 징청각이 건립된다. 현존하는 감영 건물은 귀한 가치를 지닌 몇 안 되는 관아 건축 구조물로 선화당과 징청각은 각각 대구시 유형문화 1호와 2호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대구의 누정록에 따르면「선화당(宣化堂)은 3차례 큰불을 만나 소실되었다. 맨 처음의 화재는  경상도 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민시중(閔蓍重)의 시대로 1670년(현종 11年) 3月 22日 감영 소속의 영리청(營吏廳)에서 발화하여 신구(新舊)의 문서 및 기록을 소진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성(京城)의 각사(各司)는 경상도 왕복문서를 등사하여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화의 원인은 감영의 이서배(吏胥輩)가 공금을 횡령하였다가 문서를 소각함으로써 증거를 없애려고 방화한 때문이었다. 두 번째 화재는 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조현명(趙顯命)이 재직 중인 1730년(英祖  6) 7月에서 8年(1732年) 10月 사이로 추측되는데 영사(營舍)가 전소하여 모두 신축하였다. 마지막의 경우는 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윤광안(尹光顔)의 시대로서 1806年(純祖 6年) 12月 3日 책실(冊室, 비서실)에서 발화하여 징청각(澄淸閣) 23간, 선화당(宣化堂) 36간, 여수각(如水閣) 12간, 내아(內衙) 36간, 연초당(燕超堂) 13간, 좌우익량(左右翼廊) 36간, 공고(工庫) 28간, 등 모두 184간을 전소시켰다. 가까스로 선화당(宣化堂)에 봉안된 어필(御筆) 현판 관찰사 병부(兵符), 교서(敎書), 인신(印信) 및 각 진(鎭)의 명부를 건졌을 뿐이었다. 선화당(宣化堂) 건물은 세번째 화재가 있은 뒤인 1807년(純祖 7年) 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중건한 것이다. 건물의 기왓장에 「嘉慶十二年丁卯二月臼(가경십이년정묘이월구)」로 쓰여 있어 이것이 건물을 중건한 해로 보인다. 청(淸)의 연호인 가경(嘉慶) 12年은 純祖 7年 즉 1807年이다. 선화당(宣化堂)은 기와를 이은 목조로 건평이 58경으로 남아 있다. 징청각(澄淸閣)은 1789年(正祖 13年)에 감사 이조원(李祖源)이 창건했는데 선화당(宣化堂)이 소실된 1806年(그해 純祖 6年)에 함께 타버려 이듬해인 1807년(純祖 7年)에  감사 윤광안(尹光顔)이 중건하였는데 징청각(澄淸閣) 동편에 옥령루(玉靈欄(옥령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징청각(澄淸閣)은 목조기와집으로 건평 84평이다. 1972年 12月 29日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참고문헌 : 대구의 누정록)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선화당은 여러 차례의 큰 화재를 겪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지금 현존하는 건축물은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명명할 당시에 보수공사를 거치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1807년(순조 7)에 중건된 건물이다. 선화당(宣化堂)은 임금의 덕을 널리 베풀어 백성들을 교화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감영 관아 건물다운 이름이다. 즉 대구만이 아니라 공주, 원주에 남아 있는 감영 건물들도 모두 그 이름이 선화당이다.선화당 왼쪽 뒤의 징청각(澄淸閣)은 관찰사의 집무소이다. 징과 청은 `맑다`는 뜻이므로 징청각에는 청렴하고 투명하게 행정을 집행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따라서 역대 경상도관찰사와 대구판관들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 27기가 징청각 뒤편에 세워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감영공원의 재(再)탄생.-경북청사에서, 공원으로 변신1601년, 대구시 중구 포정동 현재의 위치에 경상감영이 설치된다. 경주, 상주, 안동을 거쳐 대구로 옮겨와 있던 경상감영은 이 때부터 지금의 부산시, 울산시, 경남도, 경북도, 대구시 전체를 관할하는 거대 관청이 된다.  이때 대구는 서울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도시로 성장하는 계기를 맞았다. 특히 정치·경제·행정·사법·교육·문화·군사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전환점이 됐다. 1910년 경북도 청사로 개칭하고, 1966년까지는 경북 도청은 이곳에 있다.  산격동으로 옮겨간 이후 경상감영 일원이 공원으로 변한 것은 1970년이다.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조성됐고 1997년에‘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을 바꿔 현재에 이른다.△감영공원의 재(再)도약.- 골목투어에 힘입어 도약대구가 영남의 중심이라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경상감영.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선 감영공원이지만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 ‘최고 도심`은 당연 중구 향촌동이었다.  당시 도청 주변으로 식산은행(현 대구근대화박물관), 조선은행 대구지점(현 하나은행) 등 금융기관과 우체국·전화국·헌병대가 들어서면서 대구 중심부로 자리 잡게 된다. 그때부터 향촌동 일대에 요정과 주점, 여관 등이 들어서면서 대구의 밤을 책임지는 동네로 변모한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동성로로 상권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쇠락하더니 급기야 경상감영도 다른 공원과 마찬가지로 노인들만 즐겨 찾는 동네 공원이 된다.현재는‘골목길투어’의 영향으로 진골목, 종로 등과 함께 감영공원의 역사적 가치가 재조명 받고 있다. 시내와 가까운 거리에 한적한 데이트 코스로 젊은이들의 발길도 활발하게 이어지며 감영공원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감영공원의 재(再)구성.-교육과 휴식의 공간으로 구성지리적으로 도심지에 위치하며 그 중에서도  대구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와 매우 가까이 자리 하고 있어 그야 말로 `경상감영공원`은 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심 속의 정원이다. 복잡한 도시생활 속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도록 푸른 숲과 아름다운 꽃밭, 잔디광장이 잘 조성 돼 있다. 또 여름에는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시원한 분수, 가을에는 분위기 있는 공원과 음악,그리고 아늑한 산책로와 벤치 등이 마련 된 휴식공간이 있어 대구를 찾는 외지인들이 꼭 한번 방문하면 좋은 명소임이 분명하다.앞에서도 언급 했 듯 감영공원은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북도 청사로 사용하다 청사가 다른 장소로 이전되고 난 후 70년 중앙공원으로 개장했다. 이후 1997년 도시 미관을 해치는 담장을 허물고 공원 전체를 재조성함과 아울러,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감영공원의 문화유산을 다 보았다면 바로 옆 `대구근대박물관`을 들려보는 것도 공원의 알차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돼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이다.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돼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 49호로 지정됐다. 2008년 대구도시공사가 이 건물을 사들여 대구시에 기증했으며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돼 2011년 1월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근대기 대구의 모습과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상설전시장과 기획전시실, 체험실, 문화강좌실 등을 갖추고 있다. 또 약령골목과 진골목이 인접해 두루두루 구경 할 수 있어 마음 먹고 대구에 놀러 온 외지인들에겐 더 없이 좋은 관광 코스이다.  감영공원은 다른 지역에도 몇몇있다. 하지만 대구`경상감영공원`만큼이나 잘 보존·운영된 곳은 없다. 그건 아마 그전 누군가가 감영공원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잘 가꾸고 보존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대구`경상감영공원` 지금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는것은 우리의 몫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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