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근대골목투어 2코스의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다. ‘길’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교류와 소통의 아이콘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 ‘영남대로’가 나타난다. 종로는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종루(種樓)가 있던 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 기생들의 낭만적인 사랑과 의로움이 전개된 장소였다. 이후 진골목으로 발길을 돌려 붉은 벽돌담이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껴본다. 투어 마지막은 화교협회가 장식한다. 대구라는 지역에서 화교가 갖는 문화적, 경제적 의미는 무엇일까. 제2코스는 ‘길’들이 나그네에게 사유(思惟)의 시간을 요구한다.  ▣ 영남대로염매시장과 현대백화점 뒤에 있는 조선시대 길을 뜻한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 하나로, 부산 동래포에서 한양(서울)까지 이어져 있던 길이었다. 특히 영남지역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가는 과거 길로 유명했다. 또한 이곳을 통해 조선시대의 많은 물류들이 거래되기도 했다. <영남대로-영남대로 스토리>“천하의 형세는 산천에서 볼 수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 목판에 부기해놓은 말이다. 지리적 통찰이 스며든 명문이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영남대로는 부산에서 대구, 문경새재, 충주, 용인을 지나 서울로 이어져 있다. 거리는 약 960리(380여km)에 이른다. 실제로 이 길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가면 약 14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 길은 경상도의 58개 군현, 충청도와 경기도의 5개 군현에 걸쳐 있었고, 29개의 지선이 이어져 있었다.영남대로 대구구간의 특징은 곳곳에 시장을 끼고 있다는 점이다. 올라오다 보면 봉덕시장, 봉산시장, 염매시장, 약령시, 서문시장 등을 잇 따라 만난다. 특히 염매시장은 노점과 상설점포, 주막과 여관 등이 성밖골목(앞밖걸)에 밀집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됐다. ‘염가로 판다(廉賣)’‘소금을 팔았다(鹽賣)’고 해서 염매시장(덕산동에 위치해 ‘덕산시장’으로도 불림)으로 불린다. 영남대로 구간인 대구 도심 골목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대구 중구 계산동~염매시장을 잇는 약 1㎞ 구간. 중구 도시 만들기 지원센터의 제안으로 수협은행 벽면에 대형 풍속화가 그려졌고, 현대백화점 후면부에는 영남대로 안내 표지판과 상징 조형물이 세워졌다. 골목이 산뜻하게 바뀌자 동성로 쪽의 젊은이들이 이쪽으로 모여들고 덩달아 상권이 활성화되고 있다.▣ 종로종로는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종루(種樓)가 있던 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의 종로는 대구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에서부터 조선시대 홍실문이 있던 자리(현재의 만경관 앞 네거리)를 지나 경상감영으로 이어진다.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종루는 소리를 잃었지만 종로는 도시의 중심을 굳건히 지켜왔다. 하지만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대구에 진출했고, 종로의 세를 조금씩 빼앗아 갔다. 대신 종로에는 요정들이 들어와 대구의 밤문화를 지배했다. 또 화교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화교들에 이어 종로 상권을 장악한 것은 가구상들이었다. 이후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빈 건물이 방치되다 쇠락의 길로 내몰렸다. 이에 중구청이 도심재생사업을 벌려 대구 골목투어의 명품코스가 됐다.  <종로-타고난 재주…나라를 걱정했던 기생>종로는 예부터 기생들이 주름잡던 거리였다. 경상감영이 있던 시절에는 교방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 ‘대구 요정’시대를 이끌었다. 기생은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가무는 물론 시, 서화 등에 능한 교양인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기생 ‘앵무’는 예사롭지 않은 기생이었다. 문헌과 구전에 따르면 20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두 사람의 ‘앵무’가 등장한다. 하나는 한국기생 연구의 물꼬를 텄던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 소개된 앵무다. 경상감사 이천보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석재 서병오, 달성토성과 더불어 대구삼절(大邱三絶)로 이름을 떨쳤던 앵무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거금을 기부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 진골목진골목의 ‘진’은 경상도 말로 ‘길다’의 뜻이다. 하지만 현재의 골목은 100m 남짓이다. 골목은 짧지만 골목이 지닌 내력은 깊어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1905년 대구읍성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을 정도이다. 진골목은 근대 초기 달성서씨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다.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 지금 그들이 살던 대저택에는 식당이 들어섰다. 진골목의 종로숯불갈비, 진골목식당, 보리밥식당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이었고, 정소아과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의 방계 형제인 서병기의 저택이었다. 그런 까닭일까. 골목 양 옆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담이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진골목-남일동 패물패지부인회>1907년 2월 21일 대구 북후정(현 대구시민회관 자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서막이 열린 지 이틀 후인 23일, 진골목(당시 대구 동상면 남일동)에 사는 부인 7명은 그들이 아끼던 패물을 아낌없이 내놓았다.“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고, 국난 앞에 어찌 남녀의 구분이 있겠느냐”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애국정신은 아직까지 대구의 뿌리 깊은 정신으로 남아있다. 7명의 부인이 모여 살았던 진골목은 1907년 2월 23일 여성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진골목엔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상징하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표지석에는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진골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그들의 활동상을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는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도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290cm에 쌍가락지 모양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패물을 기부한 부인들의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진골목-정소아과>진골목 중간쯤에 있는 ‘정소아과의원’은 대구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1937년 지어진 대구 최초의 2층 양옥집이면서 당시 상류층의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대구 사람들의 삶과 위생 상태, 의료 문화의 변화를 보여주는 기록으로서의 의미도 크다. 특히 2009년 2월 진료실을 닫기까지 무려 62년간 대구경북의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건강과 새로운 삶을 안겨준 곳이다. 이 때문에 정필수 원장이 1947년 문을 연 이후 진골목의 상징이자 명물이 됐다. <진골목-미도다방>30년째 진골목의 주인인 미도다방은 대구를 대표하는 다방계의 아이콘이다. 시인 전상렬은 ‘미도다방(美都茶房)’에서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차 한잔 값의 추억을 판다”고 노래했다. 미도다방은 대구를 상징하는 문화공간, 어르신들에겐 위로 공간, 젊은이들에겐 ‘할머니·할아버지가 생각나면 미도다방에 가라’는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주인장인 정인숙(63, 여) 씨는 “대구시에서 위탁 운영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되길 원하며 당장은 다방입구 공간이라도 쌈지공원처럼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놓은 바 있다.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 중 특히 외국인들이 주인장인 정인숙 여사가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곤 매우 즐거워한다. 미도다방이 외국인에게 한국적인 멋과 맛을 소개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한편, 정인숙 씨는 해마다 어버이날과 동짓날 돼지고기와 떡, 팥죽 등을 어르신들께 대접해 왔다. 또 그는 15년째 ‘미도봉사회’를 통한 장학금 기탁으로 나눔문화를 실천하고 한국휴게음식업중앙회 대구지회장으로 사회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의 모습이 진정 단아한 이유다.▣ 화교협회2코스 골목투어의 마지막은 대구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다. 대구에 화교가 정착한 때는 1905년. 화교 경제는 광복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다. 미군정의 우대를 받아 경제력을 키우면서 6,25전쟁 때 서울과 인천의 화교들이 대거 대구로 내려와 세력이 커졌다. 전쟁 후 국내 화교는 1960년대까지 안정기를 맞았다. 대구 화교 인구도 1967년에 3018명으로 최대에 이르렀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대구 화교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화교 자본에 대한 국내 규제가 심해지면서 대만, 미국, 호주 등지로 대거 이주했다. 화교들이 운영하던 양조장과 주물공장 등도 자취를 감췄고 중국식당도 거의 사라졌다. 대구화교협회는 1925년에 지어진 서양식 붉은 벽돌건물이다. 단단한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80년이 넘었지만 보존상태가 좋아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화교협회 건물은 근대 등록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화교협회 옆에는 화교소학교가 있는데 중국식 그림과 장식 등으로 꾸며진 것이 이채롭다.(자료제공:중구청, 한국스토리텔링 자료 인용)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