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는 외동읍 말방리 소재 숭복사지에 신라 진성여왕 10년(896)에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신라 초월산 대숭복사비(新羅初月山大崇福寺碑)’를 1117년 만에 중각 건립했다.이 비석은 신라말기의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지은 이른바 사산비명(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 중의 하나이다.다른 3기의 비석은 현재까지 그 자리에 남아 국보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지만, 이 비석은 일찍이 파손돼 비편 일부만 발견됐다.이를 안타깝게 여긴 경주시에서는 다행히 비문의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비석 복원을 추진, 2008년부터 비석이 세워졌던 원위치를 찾는 발굴조사를 실시했다.또한 일제강점기 때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던 쌍귀부의 복제, 없어진 이수를 쌍계사 진감선사비의 형태로 고증 제작, 여러 필사본을 대조, 필사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바로잡고 행렬을 맞추는 비문의 교감연구, 이 비문과 같이 최치원 선생의 글씨인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문의 탁본을 이용한 비문의 집자연구, 집자된 비문을 새로 만든 비신에 새기는 각자, 제작된 비석을 현장에 다시 세우는 입비 등의 어렵고 오랜 과정을 거쳐 사업을 추진한지 만 5년이 지난해 2월에 주변정비까지의 모든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3비는 고승들의 부도탑비이지만 이 비석은 신라왕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신라하대의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특히 이 비석의 내용으로 보아 최치원 선생의 아버지가 견일(肩逸)이며, 원래의 왕릉자리에 있었던 곡사(鵠寺)를 현재의 숭복사터로 옮기고 그 자리에 원성왕릉(元聖王陵)을 조영한 사실과 경문왕(景文王)대에 원성왕릉의 능역을 다시 꾸미고 곡사를 중건했으며, 헌강왕(憲康王)이 곡사의 이름을 숭복사(崇福寺)로 바꾼 사실, 그리고 당시의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의 실상 등 귀중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이 숭복사비를 중각 건립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이었다.먼저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 입비지점을 찾기 위해 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나 관련 유구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당시 2차 발굴조사의  지도 위원이었던 경주대학교 교수인 고 ‘이근직’ 박사의 가르침으로 현재의 자리로 입비지점을 확정할 수 있었다.귀부의 복제와 이수의 고증은 경주대학교 임영애 교수, 단국대학교 엄기표 교수가 비문의 교감 및 행렬 맞춤은 동국대학교 윤선태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정병삼 교수와 당시 목포대학교 최연식교수(현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가 비문의 집자는 고탁본연구가 박영돈선생이 했고 이러한 과정들을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가 주로 자문했다.설계는 청보리건축사사무소에서, 시공은 ㈜와이케이공삼팔, 집자된 비문의 각자는 한양석재에서 맡았으며, 석공사는 종합석재 창조사가 했다.시는 숭복사비 중각 건립에 따라 숭복사지와 원성왕릉을 연계하는 역사문화 환경에 한층 풍부한 이야기꺼리를 더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많은 국내외 관광객과 탐방객들의 관심이 대폭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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