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민요 ‘아리랑’을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겠다고 예고했다. 30일간 공고 후 국가무형문화재 제○○○호로 지정하게 되는데, 이대로라면 모든 아리랑을 포괄 지정한 것이 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도 마찬가지다) 이 ‘포괄 지정’이란 표현은 전통적인 토속민요 아리랑(강원·경상 지역 중심의 아라리계)뿐만 아니라 근대에 형성된 통속민요 아리랑(1926년 영화 ‘아리랑’ 주제가 등)까지 포함한다는 것이 된다. 이는 원형성과 계보가 중시되었던 기존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지정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포괄적 표현으로서의 ‘아리랑’과 같이 아무 수식 없이 ‘아리랑’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아마 많은 이들과 특히 외국인들은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인데,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과연 아무 수식 없이 너도 나도, 해외동포도, 외국인도 알고 부르는 그 아리랑, 그냥 ‘아리랑’이라고 불리는 것은 어떤 아리랑인가? ‘아리랑’은 일본의 ‘사쿠라’(-サクラ·Sakura), 중국의 ‘모리화’(茉莉花·Jasmine Flower) 보다 더 세계적인 노래이다.아니, 미국의 ‘어메이징 그레이스’(The Amazing Grace)보다 더 세계적어서 놀라운 노래이다. 곡의 간명성과 사설(후렴)의 다의성과 함께 1930년대 중국·일본·러시아·미국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던 동포들이 고국을 그리며 부른 결과이고 한국전쟁기 유엔 병사들의 참전 기념품이 된 결과이다. 이런 연유로 ‘아리랑’하면 일반적으로 통하는 것으로, 지명(정선아리랑)이나 출현 시기(구아리랑)나 장단(긴아리랑)에 의한 명칭이 아닌, 수식 없이 그냥 ‘아리랑’으로 부르는 것이 대표성을 얻었다. 이 아리랑은 1926년 10월1일 서울 종로의 유명한 극장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아리랑’의 주제가이다. 감독 나운규가 고향 회령에서 들었던 기억을 살려 사설을 구성(전승사설과 후렴을 조합)했고, 단성사 전속 감독·변사·작곡가인 김영환(1898~1936)이 편곡, 가수 이정숙과 유경이가 부른 주제가이다. 이렇게 탄생한 주제가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과 함께 1929년까지 이 땅의 벽촌 소학교 천막극장은 물론, 일본과 중국 동포사회에까지 돌아 크게 유행을 했다. 이 주제가 아리랑은 음반사의 전략으로 최고 명성의 채규엽이나 김연실 같은 이들의 음반 취입으로 1930년을 거치며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됐다. 그래서 후편 영화 ‘아리랑 그 후 이야기’에서, 제3편 ‘말문 연 아리랑’까지, 박승희 원작 연극 ‘아리랑 고개’, 최승희 무용 ‘아리랑 조선’, 신불출 만담 ‘아리랑 반대편’, 라미라가극단 악극 ‘아리랑’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주제음악 또는 삽입곡으로 쓰였다. 그래서 이후 아리랑 담론의 주 화소는 바로 이 아리랑이 중심이 되기에 이르렀다. 연극 ‘아리랑고개’가 막을 올리는 상황에서도, 1930년대 암울함을 표현한 글에서도 그렇고, 1940년 나운규를 회고하는 글에서도 아리랑 전체를 대신했다. ▣아리랑, 조선의 상징“아리랑의 민요가 혹은 무용화가 되고 혹은 영화화가 되었으나 극화가 된 것은 토월회의 금번 공연이 처음이라 하겠다. 첫째 제재를 거기에서 취한 것부터 매우 기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름만이 얼마나 많은 흥미를 끄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사람으로 누구든지 친함을 가진 민요이다. 아리랑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 그것이 공리적으로 우리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별문제라고 하더라도···.” 극단 토월회의 연극 ‘아리랑고개’에 대한 평 (동아일보 1929년 11월 26일)▣아리랑, 센세이션을 일으켰다“아리랑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영화 ‘아리랑’과 이 영화 주제가 ‘아리랑’과 함께 조선영화계에서 보지 못한 센세이슌을 일으키었으니 지금도 그 ‘아리랑’ 노래 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없고 춤에도, 연극에도, 지금의 영화에도 이용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일….” 나운규 추모 기사, 걸작 ‘아리랑’ 만들고 마음대로 살다간 나운규(나운규 은막 천일야화, 조선일보 1940년 2월15일) ▣아리랑, 슬프디 슬픈 노래“아리랑, 이 노래 속에는 슬프다 슬프다가 슬픈 마음이 그만 원망의 불길로 변하여 가는 님을 물고 뜻고 싶도록 이를 갈고 안젓는 감정이 가득 들어차 보인다. 옛날 버들방죽에 서서 차마 말은 못하고 휘늘어진 수양버들을 휘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흐느껴 우는 처자의 모양이 떠오르지 않느냐. 실로 마디마디 야드라지게 퍼져나가는 이 애음(哀音)! 이것은 어느 한 동안 절망에 잠긴 이 땅 사람의 대표적인 정서가 될 수 있었다.” 김동환, 아리랑노래는 누가 지었나? (삼천리 1931년 2월)이 아리랑은 드디어 다른 민요 중에서도, 다른 아리랑 중에서도 먼저 세계화를 꿈꾸게 되었다. 1958년 음악가 이흥렬에 의해 아리랑 세계화가 논의됐다.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정서에 가장 잘 적응하는 곡조가 아리랑이니 이를 세계화하자고 하였다. 해방 20여년을 맞으며 아리랑이 새로운 차원에서 주목을 받은 것이다. ▣민족 정서에 적응(適應)하는 아리랑“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정서에 가장 잘 적응하는 곡조를 가지고 있다. 아리랑의 곡조는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다른 민요보다도 유난히 외국에 소개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하겠다. 요즘 우리의 생활주변에 파고들고 있는 새로운 감각에서 볼 때 아리랑은 큰 애조(哀調)가 지나치다는 감이 있으나 다른 민요보다 훨씬 파퓰러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흥렬, 우리음악과 세계화 문제, 세계일보 1958년 3월 18일) 1960년대를 맞으면서 아리랑은 국학분야에유지수서 관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본질론적 접근이었는데, 바로 어원(語源)과 시원(始原)에 관한 것으로 국문학자 양주동, 역사학자 이병도 등이 어문학적 어원론과 역사학적 시원론을 제시했다. 이런 관심과 동시에 신세계레코드사 같은 여러 음반회사가 출현하면서 인기곡 위주로 음반을 발매하며 민요편에 아리랑을 수록하자 국악계 실연자들인 성경린, 이창배 등이 음반해설 담당자로 참여하게 됐다. 이런 관계로 해설은 순수 음악학적이거나 시가문학적인 조명이기 보다는 지역성과 계보성을 주목하고 누가 각 아리랑의 명창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과정에서 각 아리랑간의 변별이 필요했다. 그것은 곡명과 성격과 명창을 연결짓는 것이 그것인데, 아리랑 곡명은 대개 지명과 출현 시기와 장단을 수식어로 해 정해지게 됐다. 이 중에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는 ‘아리랑’은 출현 배경을 기준으로 ‘주제가 아리랑’이 됐고, 생성 지역이 서울이어서 ‘경기(서울) 아리랑’이 되었고, 출현 시기가 긴아리랑 등에 이어 나왔다는 점에서 ‘신아리랑’이라고 불리게 됐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이 붙여졌는데, 그것이 바로 ‘본조(本調)’ 아리랑이다. 어의(語義)대로라면 음악 조(調)가 본(本) 또는 원류(原流)라는 말인데, 이런 본의와는 다른 의미를 담았다. 즉,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다양한 장르 작품에서 주제음악이나 수록곡으로 쓰인 아리랑을 표현한 수식어였다. 그러니까 본조는 가장 널리 쓰이면서, 아무 수식 없이 지칭되는 대표적성과 효용성을 표현한 말이 된다. 이 ‘본조아리랑’은 이후 남측에서는 학술적으로 쓰이고 있어 여타의 곡명보다 변별성이 높은 곡명이 됐다. (북한의 ‘본조아리랑’은 서도아리랑이다) 옛말에 “귀염 받는 아이는 이름이 많다”고 했듯이 이 아리랑이 가장 사랑을 많이 받으니 이름이 이렇게 많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조아리랑’은 다양한 쓰임과 이에 의한 인지도가 높은 대표성과 효용성으로 인해 ‘탁월한 보편성’(excellent universality)을 속성으로 갖게 됐다. 이 탁월한 보편성은 곧 보편가치화 되어 각종 의전음악이나 기념식음악으로 연주되어 각종 민관행사에 의례음악으로 기능하게 됐다. 이중 1990년 남북단일(유일)팀 단가를 아리랑으로 확정한 것은 바로 이 본조아리랑의 탁월한 보편성의 가치 극대화이다. 갈등과 분단의 현실 가운데 ‘단일’(유일)의 노래로 아리랑이 기능하게 된 것이다. ‘아리랑 중의 아리랑’이 되고, 세계화 되고, 남북 교류의 우선대상이 되는데는 ‘탁월한 보편성’이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다.이번의 아리랑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은 본조아리랑의 이 같은 탁월한 보편성을 재발견하고, 모든 아리랑의 속성을 보편가치화 하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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