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는 신라시대 처용가가 있고 1인 처용무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2인 처용, 조선 전기부터는 5방 처용무가 이어졌다고 악학궤범에 전해 내려온다.근대에는 1923년과 1941년에 처용무가 재현됐고, 1963년 국립국악원의 공연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조선시대 문헌 기록 속에서도 경주기생의 처용무 향연이 여러 번 나오는데특히 1848년 헌종무신진찬의궤에서 경주기녀 금옥, 분홍, 원홍이 춤을 추었다이러한 역사적인 토대를 증명이나 하듯 신라문화제 및 서블 향연의 밤 등 지역 향토 행사에는 빠짐없이 처용무를 추었으나 부산, 울산 팀이 공연했다.이는 처용무의 근원인 경주의 자존심의 문제였다.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성혜 신라처용무본존회 이사가 2012년 시도했으나 탈과 옷의 부재로 무너지고 2014년 말부터 처용탈과 처용복을 만들어 완성됐으며 처용무공연단 또한 올해 3월부터 18차례의 강좌를 통해 29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시연을 출발로 실크로드경주2015 행사기간 중 20여 차례 공연될 계획이다.‘현행 오방처용무의 무상과 무의’를 발표한 1971년 지정받은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 김용 선생은 오늘에야 ‘경주에서의 새 출발 처용무의 비젼’을 제시함에 감계가 무량하다고 전했다.‘처용무와 처용탈의 변천’을 발표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이수자이면서 가면제작자이신 김용목 선생은 처용의 연원은 경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처용무복 제작과정’을 발표한 강미자씨는 신라인이다.남원에서 시집 와 층층시하 시할머니를 모시면서 아이 넷을 두어 바느질로 살아 신라인이 됐다. 그래서 처용을 만나니 처용무복을 만든 것이다.처용탈 제작과정을 발표한 박경희씨는 배우이다.흙에서 출발, 발갛게 취한 처용을 탄생시킨 그녀는 미소까지 처용에게 주었다. 그래서 처용과 그녀가 마주하는 작업 장면은 영화 한편의 값이다.이러한 사연들을 모은 세미나를 개최한 최양식 경주시장은 “이제는 우리 모두가 처용이 되어 한삼자락 뿌리며 경주의 새로운 문화를 연출 할 때”라고 강조했다.이날 뜻 깊은 자리에는 김기조 경주문화원장, 최용석 경주예총회장 등 70여명이 참석했으며, 처용무 시연은 처용과 신라인과 배우가 스스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만들어 진 전통문화의 부활이고 다른 곳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신라 처용무의 탄생을 의미하며 문화관광 자원화로 신라처용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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