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옷을 입은 줄광대 유진호(24)가 지상 3m위에서 출렁대자 1500석의 꽉 채운 객석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견우 역을 맡은 줄광대는 8m에 불과한 동아줄 위를 오가며 직녀를 기다렸다. 동아줄의 지름은 1.5cm에 불과했다.강원도 철원 노동당사 벽면에 붉은 옷을 입은 직녀가 나타났다. 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리고, 포탄으로 건물이 파손돼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대로 드러낸 노동당사에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 건물 벽면에 쏘는 영상)로 민족의 염원을 표현했다. 까치와 까마귀가 날아와 남남북녀가 만나게끔 길을 만들었다.광복70주년 기념 ‘평화기원제’가 14일 저녁 8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노동당사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를 마지막으로 ‘DMZ 평화예술제’ 3부작 공연이 성대하게 마무리됐다. 이번 행사는 지난 9일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새로운 출발-혼례굿’으로 시작해 12일 고성 통일전망대의 ‘통일염원굿’을 거쳐 14일 철원까지 동서 최북단 휴전선 155마일을 가로지르는 대장정이었다.‘평화기원제’의 첫 무대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의 지휘로 음악원 예술영재 70인조 오케스트라가 장식했다. 이들은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의 ‘마왕’,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1906-1975)의 ‘로망스’,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의 ‘치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을 차례로 연주했다.이어지는 무대는 평화원정대가 꾸몄다. 이들은 베트남, 브루나이,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신진 예술가 40명과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의 젊은 예술가 60명 등 총 100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베트남,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등 자국의 전통음악을 연주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연극을 전공하는 실비아 안그레니 푸르바(Silvia Anggreni Purba 33)씨는 이번 공연에 대해 “아시아 각국의 전통문화를 새롭게 배우는 흥미로운 체험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남북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정치적으로 너무 멀게 느껴졌다”며 “국가 간의 문제가 풀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예술로 녹아내야 한다”고 말했다.이날 공연에서는 음악 뿐만 아니라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무언의 예술인 무용도 함께 공연됐다. 신창호 교수가 전쟁의 참상을 표현해 주목받은 LDP무용단의 ‘노 코멘트’와 2014년 바르나 국제콩쿠르 수상자로 올해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김희선의 ‘백조의 호수’, 김삼진 교수 안무의 ‘비나리’가 무대에 올랐다.우열을 가리기 힘든 ‘평화기원제’의 백미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줄타기 공연’해와 달의 살 길’이었다.김원민 ‘DMZ 평화예술제’ 총연출(한예종 전통예술원 연희과 교수)은 “전통연희인 줄타기에 첨단공연예술인 ‘미디어 파사드’를 접목했다. 원래 줄타기는 균형을 잡아야 하므로 1명만 줄 위에 올라와 펼치는 연희다. 그러나 첨단 공연예술이 접목되자 견우와 직녀 2명이 줄 위에서 만나는 환상적 공간이 만들어졌다. 분단국가인 상황을 견우와 직녀로 표현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미디어 파사드 연출을 맡은 정해현(34) 영상감독은 “견우와 직녀가 이별하기 전에 서로 만나는 과정이 5분 동안 상영되고, 이후 천둥·번개가 치며 하늘의 방해로 견우와 직녀가 헤어지게 된다. 줄타기가 시작되면 영상에서 직녀가 나타나서 연인의 재회가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북으로 분단돼 떨어져 살지만 서로 그리워한다고 믿는다. 연인으로 표현된 이별의 아픔, 그리움일, 외줄의 상징성, 애절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며 “결국 남북은 만나야 한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줄광대 유진호(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3학년)는 “영상과 호흡을 맞춰야 해서 쉽지 않았다”며 “줄타기란 균형과의 싸움이다. 남북도 아무도 어렵더라도 온갖 이해관계의 균형을 잘 맞췄으면 좋겠다. 설화 속의 견우와 직녀도 1년에 1번을 만나는데 점점 경색되는 남북 상황이 아쉽다”고 말했다.‘평화기원제’의 마지막은 평화원정대를 주축으로 전체 출연진이 출연해 아리랑을 합창한 ‘Acorss & Along’(어크로스 & 얼롱)로 마무리됐다. 이들은 ‘아리랑’을 춤과 노래와 함께 가야금을 비롯해 20여개의 민속악기로 연주했다. 총연출을 맡은 김원민 교수는 “이번 공연을 치르면서 ‘아리랑’이 얼마나 위대한 노래인지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다시 느꼈다”고 말했다.그는 “음악은 언어가 없어도 사람과 사람을 소통하게 한다”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시아 각국에서 온 신진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민속악기로 ‘아리랑’의 선율을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아리랑은 쉬우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강한 힘을 가졌다”고 설명했다.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원래 한예종 음악원과 김원균평양음악대학의 학생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연주하는 것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를 통해 추진했다”며 “북측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우리만의 행사를 준비했다. 정치적 여건이 조성된다면 평양에 한예종 분교를 건립하는 등 민간 차원에서의 남북교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