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표절 논란’이 벌어진 지 두 달여만에 ‘문자적 유사성일뿐이며 의도적 베껴쓰기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힌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에 대해 문단에선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냉정하게 사태를 봐야 한다는 ‘충고’에서부터 ‘환멸감’, 그리고 표절논의를 다시 원점으로 돌린 데 대한 ‘분노’까지 실망감의 스펙트럼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뚜렷한 반성의 태도를 보여주지 못해 비판받은 계간 ‘창작과 비평’에 이어 백 교수의 이같은 입장 표명으로 인해 문단 내부는 다시 논쟁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된다.창비가 발간하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최근 가을호에서 백영서 편집주간의 글을 통해 “(창비가 펴낸) 신경숙씨의 작품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문자적 유사성은 있지만 의도적 베껴쓰기로 볼 순 없다’는 내용의 입장을 내놓았다. 창비는 표절 논란에 휘말린 신씨 소설 ‘전설’을 담은 단편집 ‘감자 먹는 사람들’을 내놓은 대형출판사다.이어 창비의 최대주주이자 정신적 지주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표절 논란이 일어난 지 두 달여만인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창작과 비평’과 마찬가지 입장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에 원로평론가와 이번 표절 사태를 비판했던 평론가 등 문단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다.원로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창비가 스스로를 작가와 동일시하면서 객관적이고 냉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창비가 신경숙 표절과 문학권력 논쟁에 얽혀 일어나는 논의를 신중하게 지켜보아야 한다”며 “창비는 작가의 상업성을 고려하지 말고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어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환멸을 느낄까 우려된다. 창비가 한국문학의 진정성과 사회 민주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객관적이고 엄격하게 태도를 밝혔으면 좋겠다”고 했다. 임 소장은 사회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문학평론가로서 우리 사회 진보 진영의 존경을 받는 원로다. 1970년대 군사정권 치하에서 옥고를 겪었으며 2003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이끌었다. 백 명예교수의 입장표명에 “말할 의욕조차 없다”고 심한 무력감을 표현하는 문학평론가도 있었다. 김명인 문학평론가는 “신경숙 사태 와중에 이어진 창비에 대한 비판은 애정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며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응하면 더 이상 아무런 할말도 없다”고 토로했다. 김 평론가는 “마지막까지 환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창비가 좋은 작품을 많이 내는 출판사임에도 궁극의 입장이 이런 것이라면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일었던 문학권력 논쟁의 주역이었던 그는 2002년 단행본 ‘주례사비평을 넘어서’에서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제목으로 신씨의 문학이 신화화되는 과정을 비판한 바 있다. 신씨의 표절을 2000년 문예중앙 가을호를 통해 가장 먼저 지적했던 정문순 평론가는 실망을 넘어선 분노감을 표현했다. 정 평론가는 “’창작과 비평’ 가을호와 백낙청 명예교수의 입장 등은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뒤엎고 원점으로 돌리는 것”이라면서 “이 정도밖에 창비는 사태파악이 안되는 것인가. 백낙청 교수의 퇴진이 없는 한 이제 창비에 등을 돌린 독자들을 붙잡기 힘든 사태까지 왔다”고 비판했다. 또한 정 평론가는 “백낙청 교수가 ‘계속 논의해보자’고 썼지만 신 씨의 표절에 대해 이런 입장이라면 논의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창비는 신씨 표절문제와 함께 진행된 문학권력 논쟁에서 출판사 문학동네와 함께 강한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1970-80년대 진보진영을 이끌었던 창비가 이념을 버리고 상업적으로 변모한 데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같은 상업성 논란에 대해서도 백영서 편집주간은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창비는) 공공성과 사업성의 결합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왔고 창비가 그간 거둔 사업적 성과 또한 저희의 공공적 기여와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창비의 상업성은 공공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했다는 것이다.앞서 창비는 표절논란이 불거진 후 며칠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신씨 표절사태의 물꼬를 연 이응준 씨의 글이 나온 하루 뒤인 6월 17일 “표절시비에서 다투게 되는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을 가지고 따지더라고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면서 표절로 불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후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다음날인 18일엔 창비의 대표이사 강일우 씨 명의로 ‘지적된 일부 문장들에 대해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시 평론가들은 창비가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지만 표절을 인정한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창비의 정신적 지주이자 최대주주인 백낙청 명예교수까지 ‘표절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이는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두달 넘게 이어진 신씨 표절 사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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