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는 영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리즈다. 1962년 숀 코너리(1962-67, 1971)을 필두로 조지 레이전비(1969), 로저 무어(1973-1985), 티머시 달턴(1987-1989), 피어스 브로스넌(1995-2002) 그리고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다.6대 본드인 크레이그는 2006년 ‘007 카지노 로얄’을 시작으로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 ‘007 스카이폴’(2012), 그리고 오는 11일 국내 개봉하는 ‘007 스펙터’까지 총 4편을 찍었다(이하 007 생략). ‘스펙터’를 마지막으로 시리즈에서 하차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크레이그표 마지막 시리즈에 대한 국내 영화팬들의 관심도 높다. 지난달 26일 영국 현지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영국을 대표하는 첩보물 답게 역대 박스오피스 최고의 수익을 거뒀다. 개봉 첫 날 누적 흥행 수익 6380만 달러로 ‘스카이폴’이 세운 기록을 갱신했다. 특히 이번 시리즈는 ‘스카이폴’에 이어 샘 맨디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아메리칸 뷰티’(1999) ‘로드 투 퍼디션’(2002) 등 드라마에 강점을 보여온 맨디스 감독이 ‘크레이그표 007’를 마무리한 것이다.그는 ‘스펙터’에서 시리즈 최초로 본드의 과거를 그렸다. 본드의 과거와 연결돼있는 악명 높은 범죄 조직인 스펙터의 실체도 밝힌다. 스펙터는 ‘007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007 위기일발’ ‘007 산다볼 작전’ ‘007 두번 산다’ ‘007 여왕 폐하 대작전’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까지 총 6개 작품에 등장한 바 있다. 그레이그표 007을 선호했다면 이번 시리즈는 그로 시작된 007을 마무리하고 본드의 개인사까지 정리한다는 점에서 ‘필견 무비’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후반부에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007’이후 우리는 수많은 첩보원의 탄생과 그 활약을 지켜봐 왔다. ‘본’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그리고 올 상반기 히트친 새로운 스타일의 ‘킹스맨’까지. ‘스펙터’가 기존의 첩보물에 비해 더 스펙터클하다거나 더 화끈하다고 할 수는 없다. ‘007’시리즈의 클래식함이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다. 게다가 크레이그와 샘 맨디스의 조합 이후 이 시리즈는 좀 암울하고 진지해졌다. 본드하면 떠오르는 ‘허영과 낭만’이 약하다는 뜻이다.크레이그는 긴 팔다리에 근육질 몸매를 지녔지만 기존의 섹시한 미남형 본드에 비하면 좀 더 ‘노동자’에 가까운 이미지다. 화려한 파티장보다는 런던의 어느 뒷골목에서 방금 걸어나온 듯한 분위기의 스파이다. 게다가 사실적인 맨몸 액션이 강화되면서 크레이그는 첩보 임무가 얼마나 힘겨운 육체노동인지도 여실히 보여줬다. 비밀병기로 고상하게 악당을 물리치고 임무 수행 전후 뭇 여성들과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선배들과 사뭇 다르다. ‘문레이커’ 등에서 SF의 영역까지 넘나들었던 기존 007 시리즈의 본드가 남자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허구적 캐릭터에 가까웠다면 크레이그를 내세워 리부트(재가동)한 007 시리즈 속 본드는 기름기가 싹 빠진, 현실에 존재할법한 스파이로 만들어졌다. 적의 실체도 달라졌다. ‘스카이폴’에서 M도 주장하는데, 과거와 달리 지금은 007의 적이 국가가 아니라 개인 또는 국가와 상관 없는 비밀조직이다. 냉전시대 탄생된 007시리즈는 소련 붕괴 이전까지만 해도 이념적으로 갈등 관계였던 소련이 불변의 적이었다. 이후 007의 총구는 잠깐 러시아를 겨누다가 ‘007 어나더 데이’에서는 급기야 북한을 겨루기도 했다. 스펙터의 수장도 예외가 아니다. 스펙터의 수장과 본드가 개인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 그 시대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스펙터’는 또한 007는 왜 첩보원이 됐으며, 첩보원이기에 앞서 어떤 개인적 아픔을 지녔으며, 조직의 일원이지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나 인생의 때가 있다. 이 영화는 어떤 중요한 기로에 선 `인간` 007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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