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0시 22분 서거했다.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자 우리 정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김 전 대통령은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89세일기로 영면에 들었다.민주화 운동의 거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 격변기의 정치사를 상징하는 ‘3金(김대중(DJ)-김영삼(YS)-김종필(JP)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결국 영면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유신체제의 종식을 위해 가열차게 항거하며 민주화 투쟁 역사를 양분해왔던 ‘양김(DJ-JP)시대’는 종식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암울했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하며 파란만장한 격동기의 삶을 보내온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최다선 의원으로 서슬퍼런 군부정권에 당당히 맞서 대항한 민주화 지도자로서 숱한 정치적 역경을 극복해왔다.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출생한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제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최연소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중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을 대통령이라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남다른 정치지도자적 면모와 기질을 나타냈다.이러한 정치적 감각과 기질을 눈여겨 본 장택상 전 국회부의장의 비서로 발탁돼 정치에 입문한 김 전 대통령은 3선 개헌 저지의 선봉에 서면서 30여년의 순탄치 않는 야당 정치역로에 발을 내딛게 된다.‘40대 기수론’을 앞세워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면서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야권의 세대교체를 이끌어냈으며 유신체제에 맞서 항거하면서 유신체제의 종식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하지만 민주화의 서광이 밝아오기도전에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체제의 신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지는 등 정치적 고난의 길을 걸었다.신민당 총재 시절 유신정권에 맞서다 총재 직무정지와 의원직을 제명당했으며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정치적 탄압을 받던 자신의 처지와 저항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이후 정치적 극심한 부침을 겪다 1992년 대선에서 평생 라이벌인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군정 종식’을 이뤄내며 ‘문민시대’를 열었다.문민정부의 국정기조는 역사바로 세우기와 부패척결 등이며 특히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되자 5·18 특별법 제정을 직접 지시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한 것이 대표적이다.신 군부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함으로써 민주화의 거두로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잘 보여줬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와 경복궁을 복원하는 등 우리의 역사를 바로세우는데 국정운영의 상당부분을 할애했다.집권 초반 정치권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작업을 통해 부도덕한 사회지도층을 단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치적을 쌓았고, 군부정권의 잔재인 하나회 척결을 통해 문민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공을 들였다.1993년 금융 및 부동산실명제 전격 도입으로 부정부패 및 부조리 등의 온상을 제거하는 등 경제분야의 투명성 확보와 시스템 개선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고, 1995년 민선 지방자치제 실시로 중앙집권적 정부 권한을 지자체로 상당부분 이임하는 등 권력 분점에도 집중했다.다만 집권 후반 불거진 친인척 비리와 경제정책 실패로 외환위기(IMF)사태를 초래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정부는 이날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5일간 거행하고 장지는 현충원에 두기로 유족 측과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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