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에 소재하는 포은 정몽주(1337-1392)선생의 유적들이 성역화 사업으로 하나 둘 제 모습을 갖추면서 영천의 새로운 전통문화 관광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다.영천시는 지난 2012년 7년여에 걸쳐 임고서원 성역화사업을 완료하고 임고서원을 역사문화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이어 지난 10월에는 임고면 우항리에 포은선생의 생가를 중창하고 준공식을 가졌다. 이로써 영천시에 소재하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적은 임고면 양항리의 임고서원, 우항리에 새로 조성한 생가, 포은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 최초의 임고서원지인 부래산, 임고서원 서북쪽에 위치한 부모묘소 등이 있다.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소재하는 임고서원은 지난 2006년부터 7년간 198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유물전시관, 생활체험관, 조옹대, 선죽교, 용연(연못)등을 건립 또는 재정비했다.유물전시관 뒷편에 646㎡규모의 전통한식 목조건물로 건립된 임고서원충효문화수련원은 전통문화체험과 포은선생바로알기, 예학, 한학, 서예 등의 교육으로 충효정신함양과 인성교육의 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또 선생이 낚시를 즐겼다는 조옹대에서 출발해 선생의 부모묘소를 지나 임고서원을 한 바퀴 돌아보는 5km의 단심로도 비교적 평탄한 코스로 남녀노소 관계없이 선생의 충과 효를 되새기며 걸을 수 있는 좋은 걷기코스다. 단심로 중간에는 선생의 부모묘소도 만날 수 있다. 영천이씨 문중산에 위치한 선생의 부모묘소는 부 정운관, 모 변한국 대부인 이씨의 묘가 하나로 합장돼 있다. 임고서원에서 서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다.지난 10월에는 포은선생의 생가도 선생의 고향인 임고면 우항리에 중창했다. 4990㎡의 부지에 지난 2012년부터 28억원을 투입해 안채, 존양당, 부엌채, 성임문과 영정각을 중창하고 부대시설로 주차장과 소공원도 조성했다. 생가인근에는 포은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389년(공양왕 원년) 영천군수 정유에 의해 세워진 유허비도 우항리 들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들판풍경과 함께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유허비는 포은 정몽주가 부모상에 각각 3년의 여묘를 지낸 것이 조정에 알려져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며, 높이 117cm, 폭 63cm, 두께 21cm 규모의 돌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겨져 있다.최초의 임고서원지인 부래산도 생가에서 북쪽으로 불과 5백미터 거리내에 위치해 있다. 임고서원은 조선명종 8년(1553년)에 영천지역의 퇴계선생 제자들에 의해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최초 창건했다. 이듬해인 1554년에 나라에서 임고서원으로 사액됐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됐다가 선조 36년(1603년)에 지금의 자리에 중건해 선조임금으로부터 재사액됐다. 현재의 위치로 임고서원이 오게된 이유는 포은선생이 부모상을 당해 각각 3년씩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고종8년(1871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65년에 복원했으며, 1990년 신서원을 중창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영천시에서 성역화사업을 진행했다.포은 정몽주 선생(1337-1392)은 고려말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절의를 굽히지 않은 충신이다. 1337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나 고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급제해서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기도 하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기도 하고 시와 글, 그림솜씨도 뛰어났다. 또 외교술도 뛰어나 여말 명나라와의 관계개선에도 큰 역할을 했고 왜구토벌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또 효심도 지극해서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각각 3년간씩 시묘살이를 했을 정도로 효심 또한 지극했다. 특히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포은 선생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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