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삼중당이 발행한 월간 ‘아리랑’ 창간호가 코베이 12월 경매에서 250만원으로 출발, 600만원에 낙찰됐다. 광복 후 발간된 잡지 창간호로는 사상 최고가다. 함께 출품된 1953년 발행 월간 ‘청춘’ 창간호 35만원, 1954년 발행 흥사단 기관지 ‘새벽’ 창간호가 25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가격이다. 이 같은 높은 호가에 대해 경매사 측은 “창간호인 데다가 대중 잡지임에도 표지가 A급인 경우가 흔치 않고, 특히 최근의 아리랑에 대한 높은 관심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기록에 의하면 창간호와 2호는 3만부, 제3호는 5만부, 제4호는 8만부를 판매했다. 당대에 큰 인기를 누린 잡지인 셈이다. 근대 문학서를 주로 거래하는 오케이서적 측은 “아리랑 잡지는 1960년대 중반 월남 장병 위문품으로 최고 인기품이었다. 연예, 오락, 스포츠는 물론 상식과 교양을 담은 최고의 종합잡지”라고 평했다. 베트남에 ‘아리랑’ 극장이 두 곳에 세워져 잡지에 소개된 연예인들이 초청 공연을 했고, 최초의 필터 담배인 ‘아리랑’ 네이밍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리랑’ 창간호는 아리랑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다뤘다. 속 표지에 가수 박단마가 부른 밀양아리랑의 악보와 해설을 자세하게 실었다. 특집으로 사학자 유광렬의 ‘아리랑 민요의 회억(回憶)과 전망’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유광렬은 30여년 전 민세(民世) 안재홍과 아리랑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자고 했다는 회고와 함께 경주 알영정 전설과 밀양 아링각 전설 등 근원설화를 다뤘다. 이어 해방 후 불린 아리랑 사설을 10여편 소개했다.너잘났니 내잘났니 자랑을마라/ 조선은행 지폐장이 더잘났다짐잘매고 베잘짜는 동내처자는/ 양갈보 바람에 다나가네그리고 2호 예고에서 나운규와 가까웠던 전창근(1941년 영화 ‘복지만리’ 감독)이 나운규 원작 ‘아리랑’을 소설화해 연재한다고 알렸다. 결국 이 잡지는 아리랑을 제호로 활용해 아리랑이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 때문 만은 아니겠으나 아리랑은 당시에도 오늘처럼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창간호는 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 일본 아세아경제연구소에 소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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