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신라 ‘천년 왕성’의 외형부터 먼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심영섭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30일 경주시 인왕동 월성(사적 제16호) 발굴 현장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물론 월성 내부 유적과 성곽 외부 발굴 조사를 병행하겠지만, 성곽의 정비 복원을 위해 올해는 외곽 부분 발굴 조사에 좀 더 중점을 둘 것”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그는 또 “학계에서는 월성 전체를 제대로 발굴조사하는 데 최소 20-3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월성에서 앞으로 어떤 중요 유물과 유적이 발굴될 지는 현재로선 예상하기 힘들다”라고 했다. 이어 “월성은 방어 목적으로 돌로 쌓은 성이 아니라 돌로 기초를 다진 다음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라며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인근에 북궁, 남궁, 동궁으로 왕궁을 점차 확장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군 확인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날 브리핑에서 경주 월성 내부 정밀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일곽의 통일신라 후기 건물지군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월성 발굴조사의 현장 책임자인 이종훈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앞서 2014년 12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진행된 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정밀발굴 조사를 실시해 건물지군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건물지군이 확인된 곳은 월성의 중앙지역에 해당하는 C지구다. 총면적 20만 7000㎡에 달하는 경주 월성은 편의상 서편부터 A-D지구 등 4개 구역으로 나눠 발굴조사 중이다.현재 중심부인 C지구와 서편 A지구의 문지·성벽을 조사 중이다.정밀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일곽의 건물지군은 동서 51m, 남북 50.7m의 정사각형 모양이다.담장을 둘러친 일곽 안팎에 총 14기의 건물이 배치된 형태로 나타났다. 건물과 담장의 건축 시기는 인화문(도장무늬) 토기, 국화형 연화문 수막새 등 관련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봐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 신라시대에 이미 자연재해 대비어창선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초기에는 담장 안팎에 길이 36m(정면 16칸, 측면 2칸) 규모의 대형 건물 등 6동의 건물을 배치했다.이후 “내부 공간 확보를 위해 좌우 경계인 동·서쪽 담장을 허물고 건물 8동을 증축하면서 모두 14동의 건물을 갖추어 왕궁 내 시설을 완성해 나갔다”고 말했다.어 연구사는 이와 함께 “이전 건물과 새로 증축한 건물 사이에는 약 150년 정도의 시차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고했다.그는 “건물지의 기초를 다지는 건축 기술로 봐 신라시대에 이미 지진 등 자연재해를 대비한 내진설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일곽 건물지군의 성격은, 건물 유구들과 함께 확인되는 생활유물 중 흙으로 만든 ‘토제 벼루’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토제 벼루는 50점(편) 이상 출토됐는데 이는 월성 주변의 동궁과 월지, 분황사 등에서 출토된 양보다 월등히 많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일곽 건물지군에는 문서를 작성하는 중심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C지구 내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류 외에 명문이 있는 유물 등이 출토되고 있는데, 지난해에 공개한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 ‘습부(習部)’ ‘한지(漢只)’ ‘한(漢)’자명 유물 외에도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 등이 새겨진 기와와 토기가 새롭게 출토됐다. ▣ 성벽 마지막 보수 시점 8세기 전후이인숙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이 가운데 ‘전인(典人)’은 궁궐 부속관청으로 기와·그릇 생산을 담당하는 와기전에 소속된 실무자, ‘본(本)’은 신라 정치체제인 6부 중 하나인 ‘본피부’,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궁궐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아울러 두 개의 ‘테스트 피트’를 파서 실시한 C지구에 대한 탐색조사에서 두 개의 통일신라 문화층과 5개의 신라 문화층이 남아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현재까지 확보된 유물 분석자료에 의하면 월성은 주로 4세기에서 9세기까지 왕궁 또는 관련 시설이 들어섰다.신라 멸망 이후 근대 이전까지는 월성 내에 거의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지난해 하반기에 착수한 월성 서편지역 A지구의 성벽과 성문터에 대한 조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성벽의 축성 과정과 성문터의 흔적은 앞으로 밝혀질 예정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조사 자료를 분석해보면, 성벽의 마지막 보수 시점은 8세기 전후로 보인다. ▣ A지구 성밖 3개 해자 발굴 조사그리고 추정 문지 구간에서는 조선 시대 이후에 월성 내부 출입을 위해 작은 자갈을 깔아 만든 약 3m 폭의 통행시설이 확인됐다.최문정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특히 “성벽 안쪽 평탄지 일부에서는 지금까지 출토된 사례가 없는 용도 불명의 특수 기와가 발견됐다”며 “이 유물은 신라에서 기와가 처음으로 사용된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토기제작기법으로 만든 무문(無文) 암막새를 닮았으나 제작 기법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 성벽 내 건물지조사를 통해 특수 기와의 용도, 신라 초기의 기와 도입과정 등을 규명해 나간다. 이와 함께 A지구 성밖 3개 해자에 대해서도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이다. 심 소장은 “통일신라로 접어들면서 전쟁위험이 줄어들고 경주에 17만호가 살게 되면서, 한 때 최대 50m에 달하던 해자의 폭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건물지가 들어선 흔적이 발굴돼 추가 조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