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인 씨름이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됨에 따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기가 시들해진 씨름이 다시 ‘국민스포츠’로 부활의 날개를 펼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다. 씨름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씨름의 역사와 현주소를 짚어봤다. ▣씨름은 언제부터 시작됐나한국씨름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씨름에 대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부족국가 시대에서 발견되는 ‘치우희’라는 명칭이다. 중국의 ‘25史’와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 ‘환단고기’(桓檀古記) 중 ‘삼성기’ 상·하 편에 ‘치우천왕’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전설적인 무신인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중국의 ‘후한서’와 우리나라 ‘조선상고사’에 ‘각저희’ ‘씰흠’이라는 명칭으로 씨름에 관한 일화가 기록돼 있다. 본격적인 씨름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꼽는다. 특히 삼국 중 유일하게 고구려 벽화에서 씨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 각저총의 벽화와 장천 1호분의 벽화가 그 예다. 고려시대의 씨름은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씨름에 관한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군사들에게 씨름을 겨루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송경지’ ‘동국세시기’ ‘경도잡지’’해동죽지’ 등의 문헌에 씨름에 관한 서술이 다수 등장한다. 단원의 풍속도, 기산의 풍속화, 유숙의 대쾌도 등에서는 그림으로 씨름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된 씨름 씨름이 오늘날과 같은 대회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건 1912년 10월 서울 단성사 극장의 주인이었던 영화제작자 박성필 씨가 조직한 유각권구락부(柔角拳俱樂部)의 주관으로 개최된 씨름대회부터다. 이후 씨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27년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초대 회장으로, 현 통합씨름협회(대한씨름협회의 후신, 회장 박팔용)의 시초가 된 ‘조선씨름협회’가 창단된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도 씨름은 명맥을 유지했다. 1927년 서울 휘문고등학교에서 시작된 ‘제1회 전조선 씨름대회’는 1934년 제6회 대회까지 이어지다가, 2년 후인 1936년 다시 ‘제1회 전조선 씨름선수권 대회’로 이름을 바꿔 개최됐다. 이 대회 역시 1941년 제6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됐다가 1946년 조선씨름협회가 ‘대한씨름협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경기단체 중 열 다섯번째로 대한체육회에 소속됐고, 1947년 ‘전국 씨름선수권 대회’로 대회를 재건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씨름대회는 명멸을 거듭했다. 1959년 ‘전국 장사 씨름대회’가 신설됐으나 6회만에 대회가 없어졌고, 1972년에는 ‘KBS배 쟁탈 전국 장사대회’가 시작됐으나 1994년 막을 내렸다. ▣씨름, 다시 부활을 꿈꾸다 컬러TV가 보급된 1980년대 이후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씨름은 국민스포츠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씨름의 인기를 업고 일양약품, 보해양조, 럭키증권, 현대, 삼익가구, 부산조흥금고, 인천 등이 잇달아 프로씨름단을 창단했다.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강호동 등 씨름 천하장사들은 이 시기 슈퍼스타급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팀 해체가 이어졌고, 씨름 역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통합씨름협회에 따르면 현재 씨름 관련 등록된 전문 단체는 230개, 선수는1599명이다. 전국체육대회 등 국가체육대회와 ‘천하장사씨름대축제’ 같은 지역장사대회를 포함해 한 해 공식 행사로 인정받는 씨름대회는 2016년 기준 약 19개다. 민속놀이 씨름의 부활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2012년부터 가시화했다. ‘씨름진흥법’이 제정돼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날을 ‘씨름의 날’로 정했으며, 문화재청은 2013년부터 씨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말에는 등재 신청서를 유네스코 사무국에 제출했다. 심사는 2018년쯤 이뤄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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